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6일 전격적으로 만남에 따라 그동안 극한 대치 상황이 벌어졌던 남북 관계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 조짐이 보이고 있다. 당장 현 회장과 김 위원장의 회동을 계기로 그동안 중단된 남북 당국 간 고위 회담이 재개될 가능성도 짙다. 하지만 김정일 면담이라는 이벤트가 남북 관계에 미칠 영향이 예상보다 제한적일 것이라는 신중론도 적지 않다. 북한이 핵 문제에서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야만 경제협력과 남북 관계 진전에 노력한다는 정부의 대북기조가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북측이 핵 포기와 관련한 구체적인 신호를 보내지 않는 한 북한의 일시적인 유화 제스처에 정부가 선뜻 손을 내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남북 관계 분수령 기대감=사실상 정부의 메신저 역할을 맡았다고 볼 수 있는 현 회장과 김 위원장의 전격적인 회동으로 남북 관계는 전환점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 지난 4월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진 대남 무력 압박의 수위가 낮아지고 남북 관계에 대화의 기운이 조금씩 싹틀 수 있다. 정부의 한 소식통은 “북한의 대남 압박이 7월 중순을 고비로 한풀 꺾인 것으로 보인다”면서 “핵실험을 통해 내부 체제 다지기에 성공하고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핵 보유 의지를 충분히 과시한 상황에서 추가 무력 도발보다는 유엔 안보리의 제재 예봉을 피하기 위해 유화 제스처를 취하는 흐름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로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는 위기 상황에 처했더라도 당장 핵무기를 포기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점이 남북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핵무기를 체제 유지의 보루이자 후계구도의 도구로 삼는 입장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여론 향방에 따라 언제든지 문을 다시 걸어 잠그고 무력시위에 나설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정부의 대북정책 단계적 변화 가능성=김 위원장이 4개월 이상 북에 억류됐던 유성진씨를 석방하고 현 회장과 면담에 나선 것은 우리 정부에 대한 일종의 유화 제스처 성격이 짙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현 회장과 김 위원장의 만남을 통해 남북 두 정상이 간접적인 정상회담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북한은 현 회장 초청과 유씨 석방을 계기로 우리 측에 대북정책 변화 여부를 우회적으로 타진한 셈이라는 진단이다. 하지만 정부로서는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국제사회가 북한에 강한 제재를 가하는 분위기 속에서 섣불리 북한의 손을 덥석 잡아줄 명분이 부족하다는 점이 부담이다. 북한이 북핵 6자 회담을 거부하며 핵 프로그램에 대한 의지를 계속 고집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 위원장의 구애 공세를 마냥 반길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 대북 전문가들은 정부가 인도적 대북 지원의 폭을 늘리는 방식으로 북한과의 관계 회복을 시도하고 북측이 개성공단 제한조치를 해제하거나 남북 당국 간 대화를 제의하는 등 뚜렷한 태도 변화가 보인 후에야 비로소 단계적으로 대북 전략을 수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금강산관광 중단의 원인이었던 고 박왕자씨 피살사건에 대해 우리 정부가 요구해온 북측의 명확한 사과, 진상규명, 재발방지 약속이 있기 전까지는 정부의 대북정책 변화의 폭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반면 일각에서는 현 회장의 방북을 계기로 김 위원장의 통 큰 결단이 이어지면 우리 정부도 이에 적절한 보상조치를 벌일 가능성이 있다고 점치고 있다. 이에 따라 결국 현 회장 방북을 계기로 남북의 정상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어느 정도 바꿀지가 앞으로 남북 관계의 변수가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