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초 새로운 제국 명나라는 바다로 세계로 힘을 뻗쳐 멀리 아프리카 남단까지 대함대를 보내 힘을 과시하고 문물을 교류했다. 30년여간 계속된 이 항해를 역사에서는 ‘정화의 남해 원정’이라고 부른다. 바다의 주인이 된 명나라는 인도양과 서태평양을 한 세대 동안 독점적으로 지배했다.
영락제와 그의 뒤를 이은 홍희제, 선덕제는 이 원정이 갖고 있는 세계사적 의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몇 번의 성공 후에 영락제는 이 원정에 관심을 잃었고 환관과 부패한 관료들이 결탁해 정화의 원정길을 방해했다. 그리고 선덕제 말에 부패한 관료들은 이 원정을 금지시켰고 명나라는 해상 교역을 차단하는 해금정책을 선택했다. 바다를 막은 명나라는 망하는 그날까지 동아시아 바다를 점령해오는 유럽 국가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서서히 무너져갔다.
이웃 나라였던 조선도 명나라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개국 초에 류큐ㆍ필리핀ㆍ일본ㆍ 대만과 바다로 교역을 했던 조선은 어느 순간 바다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렸다. 사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조선은 원래 수백년간 해금정책(쇄국정책)을 채택한 나라였다. 해금정책으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황해를 가득 채웠던 무역선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수많은 사신단을 중국에 파견한 조선은 놀랍게도 500년여간 단 한차례도 바다를 이용해서 중국 사신단을 보낸 적이 없다.
이런 해금정책은 필연적으로 가난을 불러왔다. 상공업과 무역이 발전하지 못했고 간편한 결제 수단을 제공하는 화폐제도가 쇠퇴했고 금과 은의 채굴도 금지됐다.
이러한 때 조선의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를 편찬했다. 그는 조선이 아무리 가난해도 이웃 나라와 교역을 할 수 있는 비교우위의 물자가 있으며 배를 이용해 무역을 한다면 가난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무역을 일으키면 뒤떨어진 도자기 생산기술도 발전시키고 화폐 사용도 활발해지며, 제조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설파했다. 돈을 원활하게 돌리는 시스템을 만들면 내수를 키우고 사람들을 풍요롭게 만들어 조선도 청나라처럼 선진화된 나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박제가의 진보적인 생각은 국가 정책에 반영되지 못했다. 당시 지배층의 주류였던 주자학자들은 상공업을 장려하고 무역을 촉진하는 그의 주장을 매우 위험한 것으로 봤다. 백성을 부자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북학의’와 같은 시기에 영국의 애덤 스미스가 펴낸 ‘국부론’은 박제가와 비슷한 중상주의 정책을 담고 있었다. 박제가는 시대를 앞서간 탁견을 제시했지만 조정에서는 이 탁견을 채택하지 않았다. 시대를 앞서간 이 정책을 정조임금이 채택했더라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때마침 연 2년째 무역 1조달러 달성에 성공, 세계 8강에 진입한 소식을 들으며 다시 한 번 무역의 중요성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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