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 마치고 공안 꿈꿨지만 부친·정부 권유에 입행 결정
업무경시대회서 전국 1등 이어 지방 돌아다니며 노하우 전수
'빠른 이자 계산법' 책도 펴내
인민銀 옌볜센터부행장 승진 후 적자 난 옌볜 교통銀 구원 등판
실력 검증 받자 2004년 한국행
"한국의 위안화 허브 적극 지원"
중국 문화대혁명의 끝자락이던 1970년대. 중국의 고등학생들은 대학이 아닌 농촌으로 보내졌다. 소위 '재교육'을 위해서였다. 성실하게 2~3년 정도 일 하다가 농민들의 추천을 받으면 공산당에 입당하거나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추천을 받지 못하면 영원히 농촌에 남아 농부로 살아야 했다.
국내 유일의 위안화 청산결제은행인 교통은행 서울지점을 이끌고 있는 남광혁(58·사진) 대표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달 24일 서울시 중구 교통은행 서울지점에서 만난 남 대표는 문화대혁명부터 시작해 격변해온 중국의 현대 금융사를 함께한 자신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풀어놓았다.
남쪽으로는 북한, 동쪽으로는 러시아에 인접한 지린성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 대표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두만강 바로 옆에 있는 징신이라는 농촌으로 2년간 보내졌다. "봄부터 시작해서 밭에다 비료를 펴고 밭갈이를 하고 또 모를 심고 나서 김매기를 많으면 다섯 번까지 해야 했어요. 그러면 추수철이 돌아오지요. 그렇게 1년 내내 농사를 지어서 풍작이면 한국 돈으로 1년에 100만~200만원을 벌었어요. 지금도 밥을 먹을 때 쌀 한 톨 남기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그 시절 피땀 흘려 농사를 지어봤던 경험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농촌에서의 재교육이 끝난 후 2년 반의 군 생활까지 마치자 남 대표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정부가 공안과 공무원·은행원 등 세 가지 직업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제안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의 선택이 은행은 아니었다. "저는 그때 공안에 가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정부에서는 군대에 가서 이미 총을 잡아봤으니 이제 은행을 가보는 게 어떻겠냐는 거예요. 돈이 없어서 저축도 거의 못해본 저에게 말이지요.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상의를 하는데 은행은 모든 게 숫자이니 수학을 잘하는 제 적성에 맞을 거라며 은행에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지난 1980년, 그렇게 남 대표는 당시 중국의 유일한 은행이던 인민은행에서 20년간의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다. 은행에 들어간 남 대표는 입사 초기부터 주목을 받았다. 다름 아닌 비상한 수학 실력 때문이었다. "창구에서 일한 지 반년쯤 됐을 무렵 전국 은행원들 대상으로 '업무 경시대회'라는 게 열렸어요. '1960년도 3월5일에 고객이 은행에서 200위안을 예금하면 1980년 5월5일에 이자 얼마를 줘야 하나' '적금을 언제부터 언제까지 들었는데 중도 해지를 하면 얼마를 줘야 하나' 등의 문제가 나왔어요. 중도 해지 이율이 얼마인지, 1960년도 기준 금리가 얼마인지, 20년간 금리가 어떻게 변동됐는지는 전혀 알려주지 않아요. 이런 문제 10항목을 15분 만에 풀어야 했어요."
문제를 다 풀지 못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인 이 대회에서 남 대표는 1등을 거머쥐었다. 그가 10문제를 푸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분이었다. 오죽하면 옌볜자치주 담당자들이 '믿지 못하겠다'며 내려와 남 대표만을 앉혀놓고 두 번의 재시험을 봤을 정도였다. 그가 A형 문제지를 다 푼 시간은 1분 36초, B형은 1분 24초에 불과했다. 결국 지린성 대표선수로 뽑힌 남 대표는 이후 2년 정도 다른 지역 대표들과 계산 시합을 하면서 전국 1등을 차지했다. 이후 지방을 돌아다니며 관련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역할을 하며 지내던 그는 이자를 빠르게 계산하는 방법을 담은 '콰이쑤파(쾌속법)'라는 책까지 냈다. 하지만 그는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학업에 대한 더 큰 갈망을 갖게 됐다.
"마침 인민은행에서 젊은 인재를 육성한다면서 성마다 3명씩 선발해 대입 준비를 시켜주고 합격하면 대학 비용도 대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시험을 봐서 선발이 됐는데 저더러 반장까지 맡으라는 거예요. 정말 부담스러웠어요. 당시만 해도 조선족인 저는 지금처럼 중국어를 잘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전국에서 뽑혀온 반 친구들은 하나같이 계좌번호와 고객 이름, 주소를 1,000개씩 외우는 계산과 암기의 달인들이었지요. 이 친구들을 이끌면서 학업과 반장일을 완벽히 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로부터 1년 뒤 허난성 정저우대에 입학한 뒤 꼬박 3년 동안 자정 이전에 자 본적이 없을 만큼 공부에 매달렸다. 그는 1987년이 돼서야 학업을 마치고 은행으로 돌아왔다. 지린성 본부에 남으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현장에서 경력을 쌓겠다며 남 대표는 고향 옌볜으로 향했다. 이후부터 그는 쾌속 승진했다. 1995년 옌볜에서 인민은행 부행장을 할 때 이미 다른 부행장들과는 많게는 열 살까지 차이가 났다.
그가 인민은행에서 일한 지 20년이 지나는 사이 중국에서는 유일한 은행이던 인민은행 외에 농업은행과 교통은행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2000년 우연히 옌볜 교통은행장 자리가 비면서 남 대표는 인민은행의 추천을 받아 교통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옌볜 교통은행은 적자가 컸어요. 이걸 해결해보려고 고심을 하고 있었는데 행장 부임 이듬해인 2001년 상하이 본점에서 우리 은행의 예산을 무려 100만위안이나 삭감한 거예요. 너무 놀라 본점을 찾아갔더니 옌볜 교통은행을 폐쇄할 수도 있다 하더군요. 본점 행장을 만나 담판을 지었어요. 1년에 옌볜에 송금되는 금액만 20억달러인데 이 시장을 놓칠 수 없다고 읍소했죠. 또 옌지시 정부와 주거래 계약을 맺은 서류를 보여주면서 회생 가능성이 있다고 설득을 했어요. 그래서 가까스로 폐쇄를 면했죠."
남 대표는 적자 상태의 은행을 살리기 위해 맨몸으로 부딪혔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광장 같은 곳에 주말마다 나가 북을 치면서 카드 영업을 직접 했어요. 카드 상품도 많이 개발하고 옌볜에서는 처음으로 환매매 시장도 열었지요. 고객들이 점점 늘어났어요. 또 당시에는 학생들이 유학할 때 반드시 예금증명서를 제출하도록 돼 있었는데 이게 다 암시장이었어요. 그런 문서 하나 만들려면 중국 돈으로 1만위안까지 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걸 훨씬 싼 가격에 은행에서 발급하자 그야말로 고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뤘어요. 적자 은행이 2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어요."
교통은행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2004년 교통은행 서울지점 준비위원장을 맡았고 2005년부터 지금까지 10년간 교통은행 서울지점 대표로 재직 중이다.
"저는 정말 복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교통은행 서울분행을 만들 때도 다른 외국은행 지점들은 사무소에서 지점 설립까지 수년이 걸렸던 반면 저는 한국에 들어온 지 반년 만에 분행을 세웠고 또 지난해에는 청산결제은행이라는 중책까지 맡게 됐으니까요. 특히 청산결제은행을 맡게 된 것은 운명이 아닌가 싶어요. 그 옛날 은행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인민은행에서 하던 일이 바로 위안화를 시중 은행에 빌려주는 일이었으니까요. 한평생 쌓은 금융인으로서의 경력을 십분 발휘해서 앞으로 교통은행이 한국 정부의 위안화 금융허브 구축을 지원하는 한국의 공공 인프라로 자리 잡아 위안화의 원활한 거래를 도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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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 '위안화 청산결제은행' 교통은행 서울지점 "교통은행이 도로 만드는 회사? 韓-中위안화 고속도로인 셈" |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