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제롬 파월 의장이 내년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연준이 날린 비둘기에 주식과 채권값이 동시에 급등하는 등 글로벌 금융시장에 모처럼 화색이 돌았다.
파월 의장은 28일(현지시간) 뉴욕 이코노믹클럽 연설에서 “현 기준금리는 중립 금리의 ‘바로 밑(just below)’에 있다”고 밝혀 기존의 매파적 입장을 크게 누그러뜨렸다. 중립 금리는 물가 상승이나 자산가치 하락 등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잠재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는 이상적 금리 수준이다. 현재 금리가 중립 금리에 근접했다는 얘기는 연준이 기준금리를 추가 인상할 여지가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연준이 내년에도 3차례 이상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것으로 예상해온 금융시장은 이날 파월 의장의 발언이 연준의 노선 변경을 시사한 ‘비둘기적(Dovish·통화 완화적)’ 시그널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파월 의장은 지난달 초까지만 해도 금리 수준이 “중립으로부터 한참 멀리 있는 듯하다”고 밝히며 지속적인 긴축을 시사한 바 있으며 실제 연준은 최근까지 다음달 추가 금리 인상 이후에도 내년 금리 인상 횟수를 3회로 전망했다. 골드만삭스는 연준의 매파적 면모와 경기 호조를 고려할 때 내년에도 올해에 이어 4차례 금리가 오를 수 있다는 예상을 내놓기도 했다.
파월 의장은 이날 연설에서 “현재 기준금리는 역사적 기준에 비춰보면 여전히 낮다”면서도 “경제를 과열시키지도, 둔화시키지도 않는 중립 수준으로 추정되는 폭넓은 범위의 ‘바로 밑’에 있다”고 말했다. 파월 의장은 이어 시장의 섣부른 예측을 경계하듯 “연준의 통화정책은 사전에 설정된 경로를 갖고 있지 않다”면서 “향후 경제지표에 긴밀하게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중립금리를 2.5~3.5%로 추산했던 연준이 현재 2.00~2.25%인 기준금리가 중립에 근접했다고 판단했다면 하단 쪽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많은 연준 당국자들이 중립 금리가 2.75%에서 3% 부근이라고 여긴다”며 다음달 중순 열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의 금리 인상분을 감안할 때 내년 인상 횟수는 많아야 2차례로 제한될 수 있다고 파월 의장 발언을 해석했다. 일각에서는 내년 연준의 금리 인상이 한 차례로 끝날 수 있다는 예측까지 제기됐다.
이날 파월 의장의 발언에 앞서 연준이 발표한 금융안정 보고서가 지속적 금리 인상의 위험성을 시사한 점도 연준의 속도조절론에 무게를 실었다. 연준은 보고서에서 “기업 대출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은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이라며 “무역 갈등 확대와 지정학적 불확실성 증대 등은 위험 자산에 대한 수요를 전반적으로 줄이며 큰 폭의 자산가치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 3·4분기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3.5%에 이르고 소비 및 고용이 호조를 보이면서 내년까지 지속적인 금리 인상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던 금융시장은 내년 통화정책에서 완화적 기대감이 커지자 환호했다. 최근 잇따른 급락 속에 약세장에 진입했다는 관측까지 나온 뉴욕증시는 이날 다우존스산업지수가 2.50%,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은 2.95% 급등하는 등 8개월 만에 가장 강한 상승세를 보였다. 10년물 미 국채 금리가 0.013%포인트 하락해 6주 만에 가장 낮은 3.044%로 거래를 마치는 등 국채값도 뛰었다. 미 금리 인상 기대치가 낮아지자 달러화도 약세를 보여 유로·엔 등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DXY)는 0.5%가량 하락한 96.84에 머물렀다.
다만 파월 의장이 “미리 정해진 정책 경로는 없다”며 내년 3차례 금리 인상 전망이 ‘섣부르다’는 관측에 힘을 실으면서도 미국의 성장 둔화나 인플레 약화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은 만큼 연준이 시장 기대만큼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펼지는 미지수다. WSJ는 “연준이 최신 경제 지표에 입각해 금리 정책을 결정하기로 하면서 내년 행보를 예상하기 훨씬 어려워진 것은 분명하다”고 짚었다. 최근 금융 및 원자재 시장이 크게 흔들리자 연준 지도부가 완화적 제스처를 취하기는 했지만 경기 과열 조짐이 부상하면 매의 발톱을 곧장 드러낼 가능성도 열어뒀다는 설명이다./뉴욕=손철특파원 runiro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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