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판으로 내려가 바라본 한라산은 짙은 해무를 딛고 일어서 멀어져가는 제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듯 합니다. 섬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어 보지만 정작 섬은 점점 멀어져만 갑니다. 꿈에서 갓 깨어난 것처럼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시간들이 찰나에 스쳐갑니다.
소풍같은 날들이었습니다. 직업이 곧 꿈이어야 하는 사회에서 그 꿈을 이룬 청년이 현실과 부딪혔을 때, 그 심각한 문제를 함께 고민해준건 제주였습니다. 마치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것과 같은 생활 속에서 비로소 진짜 꿈을 돌이켜보게 만들어준 것 역시 이 섬이었습니다.
그런 시점에 제주유기동물센터를 찾아간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사이로 드러난 규모를 짐작할 수 없던 센터의 첫 모습은 나를 위한 또다른 감옥 같았습니다. 말없이 설거지를 하고, 배변판을 닦고, 동물들의 오물을 걷어내는 것이 힘들기보다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달, 두달 시간이 흐를수록, 센터의 식구들과 친해질수록 그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닌 위로받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더러운 아이를 씻기고, 미용시키고, 행동과 습성을 파악하며 오히려 그들이 나를 챙기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착각에도 빠졌습니다. 안아달라, 만져달라가 아닌 ‘왜 이제오냐’는 듯 말을 거는 아이들에게 언젠가부터 ‘반드시 새 가족을 찾아주겠다’고 말하며 함께 행복한 결말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센터를 찾는 봉사자들은 불쌍해서, 동물이 좋아서 왔다고 말합니다. 돌이켜보니 우리 모두 외로움 때문에 그들을 좋아한건 아니었는지 돌아봅니다. 목적에 의한 관계를 맺고, 하루하루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휴식처이자 즐거움이었을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늘 직책과 직업으로 불리던 제게 이름을 불러주시던 친근한 얼굴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봉사하던 첫날 ‘복받으실겁니다’라고 말했던 제가 오히려 그 말을 듣는 입장이 되다보니 이 길고도 짧은 시간이 누구에게나 한번쯤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위로가 되어준다는 것, 사람이 하기도 힘든 그 어려운 일을 이 아이들이 대견하게 해냅니다.
제주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센터에 올라간 날, 모든 봉사자가 떠난 늦은 오후였습니다. 분양동 불을 끄기 전 아이들과 마주하며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지 말고, 넘어지기 전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한번 들어오면 혼자 힘으로 나갈 수 없는 이곳에서 새 주인을 만나 즐거웠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이제 우리 만나지 말자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반려동물이 먼저 하늘나라에 가면 늦게 찾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다 반겨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새 주인을 찾은 아이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아이들 모두 먼 훗날 저를 반기러 와주겠죠. 그때는 화내지도 때리지도 말고, 웃으며 배변판도 갈아주고 밥도 주고 못해줬던 산책도 실컷 시켜줘야겠습니다.
다시 기적이 웁니다. 길었던 소풍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혼자서만 너무나 큰 위로와 감동을 안고 떠납니다. 소풍을 끝내는 오늘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관광지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곳에 육지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상이 있고, 외로움과 아픔이 있고, 버려짐과 새 가족이 있음을 보고 떠납니다. 우리는 언제쯤 이 아이들과 함께 웃음만 짓는 날들을 보낼 수 있을까요. 그런 좋은 날, 함께 다시 만나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모두 복 받으실 겁니다. (끝)
제주유기동물보호센터는 상시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문의는 다음카페 제주유기동물사랑실천(http://cafe.daum.net/organicanimal), 페이스북 제주특별자치도 동물보호센터(https://www.facebook.com/jejuanimalshelter), 전화 064-710-4065(제주특별자치도 동물보호센터)를 통해 가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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