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67) 전 미국 국무장관이 12일(현지시간)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 도전을 공식 선언했다. 지난 2008년 대선에 이어 두 번째로 이번에는 '인자한 할머니'처럼 중산층과 서민 가정 경제를 보살핀다는 이미지를 주요 선거전략으로 내세웠다. 7년 전 민주당 경선에서 '거만한 귀족'이라는 이미지 탓에 '블랙 돌풍'을 일으킨 버락 오바마 후보에게 일격을 맞은 아픔을 교훈으로 삼은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부동의 지지율 1위인 클린턴 전 장관이 출사표를 던지면서 2016년 미 대선 레이스도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클린턴 전 장관은 이날 오후3시 선거캠프 홈페이지인 '뉴 캠페인' 웹사이트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개한 2분19초짜리 인터넷 동영상에서 "평범한 미국인들은 챔피언을 필요로 하고 있고 내가 그 챔피언이 되고 싶다"며 대선 출마를 공식화했다. 동영상을 통한 출마 선언은 2008년과 같지만 내용은 크게 달라졌다. 이번 동영상에는 딸을 홀로 키우는 '워킹맘', 창업을 준비하는 청년, 일하는 장애인, 동성애자 커플, 2세를 기다리는 젊은 부부, 제조업 근로자 등 사회적 소수자나 서민들이 출연했다.
클린턴 전 장관은 90초 뒤에나 출연해 "미국인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아직도 상황이 어렵고 위쪽(상위층)만 유리하다"며 "모든 가족이 강해질 수 있도록 여러분이 나의 여정에 동참해주기를 희망한다"고 역설했다. 부의 불평등 해소와 기회의 균등, 임금인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함으로써 최대 표밭인 중산층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전략을 구사한 셈이다.
자세도 바뀌었다. 그는 교외의 중산층 가정집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등 겸손한 자세로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켰다. 과거 동영상에서는 '이기기 위해 출마했다'는 슬로건 아래 실내 소파에 앉아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웅변했다가 '오만한 특권층'이라는 역풍을 불러왔다. 딸인 첼시 클린턴도 이날 공개된 여성 월간지 '엘르' 5월호 인터뷰에서 어머니·할머니로서 클린턴 전 장관의 모습을 강조하려 애를 썼다.
클린턴 전 장관의 친서민 전략은 첫 유세지가 14일 아이오와주라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7년 전 클린턴 전 장관은 첫 후보 경선이 열린 이곳에서 오바마 후보에게 패배하는 바람에 '대세론'이 허물어지는 쓰라림을 맛봤다. 이 때문에 지지자들을 대규모로 동원하는 대신 '낮은 자세'로 타운홀 미팅, 커피숍이나 어린이집 방문 등 소규모 행사에 집중할 예정이다.
현재로서는 클린턴 전 장관이 2008년보다 유리한 고지에 올라서 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무엇보다 민주·공화당을 통틀어 유력한 대항마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클린턴 전 장관의 지지단체인 '레디 포 힐러리'는 이미 1,100만달러 이상을 모으면서 경쟁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또 과거와 달리 연령과 계층을 막론하고 골고루 높은 지지율을 보여 '힐러리 대세론'이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민주당 내 반(反)힐러리 진영에서조차 "힐러리는 누구도 세울 수 없는 기차"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도 최근 "클린턴 전 장관의 대통령 당선에 베팅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초반에 지나치게 앞서 있다는 게 오히려 약점으로 꼽힌다. 앞으로 당내 경선이나 본선에서 집중 포화를 맞을 게 뻔하다. 퍼스트레이디, 상원 의원, 국무장관 등 화려한 경력도 부메랑이 될 수 있다. 클린턴 전 장관 측은 풍부한 관록과 안정감, 똑똑하고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점을 내세우지만 일반 국민들에게는 식상함을 넘어 '구시대 인물'로 비쳐지고 있다.
특히 지금은 공화당 잠룡들의 지지율이 '도토리 키재기'이지만 대선 후보 선출로 양자 구도가 될 경우 판세가 요동칠 수 있다. 이미 국무장관 재직 중 개인 e메일 사용, 리비아 벵가지 미국영사관 피습 사건, 클린턴재단의 기부금 과다유치 논란 등의 여파로 지지율이 흔들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9일 미국 퀴니피액대의 3개 경합주 조사에 따르면 버지니아에서는 지지율이 하락했고 아이오와·콜로라도에서는 공화당 주자들에게 추월당했다. 오바마 대통령과의 관계설정도 문제다. 7년 전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경제실정을 공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민주당 정부를 계승해야 한다는 점에서 방어에 주력해야 할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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