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암연구회의 막내였던 안조영은 1993년 8월에 입단했다. 이듬해 한국기원이 관철동에서 왕십리로 이전하면서 인사동에 있던 충암연구회도 왕십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필자는 인사동에서 다시 관철동으로 돌아왔다. 종로의 한국기원을 세놓게 되었는데 필자는 한국기원의 출판부장이었던 경력을 인정받아 거의 무료로 사무실 하나를 점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매일 보던 충암연구회의 청소년 기사들과도 사이가 뜸해졌다. 이따금 왕십리의 충암연구실에 들렀지만 안조영을 만날 기회는 드물었다. 나는 김승준이나 김성룡에게 안조영의 근황을 묻곤 했다. “조영이는 장고파로 소문이 났어요. 언제든지 조영이의 대국이 제일 늦게 끝나요.”(김성룡) “끈기의 화신이 되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아요.”(김승준)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재기발랄하던 미소년이 장고파로, 끈기의 화신으로 변화한 것도 나쁠 것은 없지.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마땅히 그렇게 변화해야지. 고등학생이 된 안조영은 키도 훌쩍 자라고 눈빛이 깊어져 있었다. 그가 신인왕 타이틀을 따낸 것은 2004년의 일이었다. 입단 후배인 목진석, 조한승, 이세돌, 송태곤이 그에 앞서 신인왕으로 각광을 받은 다음이었다. 그는 최고위전, 패왕전, 명인전, 기성전에서 한 차례씩 준우승을 차지하더니 2007년 2월 드디어 십단전에서 우승하여 타이틀홀더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지금 소개하는 바둑은 물론 십단등극 이전의 것이다. 백66을 외면하고 패를 해소한 것은 당연했다. 흑75가 놓이자 우변 백대마가 전멸했다. 그 이후는 거의 무의미한 수순이다. 백98로 참고도의 백1 이하 5로 두어보아도 흑6으로 그만이다. (62, 69…59의 위. 65…59) 199수끝 흑불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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