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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가 엔지니어에 '개발 전권'…256M D램부터 30년간 초격차
산업 산업일반 2025.02.09 17:48:141994년 8월 29일 경기 용인시 삼성전자(005930) 기흥캠퍼스의 한 팹(반도체 생산 공장)에 수십 명의 엔지니어들이 아침 일찍 모였다. 3년여간 개발해온 256메가(M) D램의 정상 작동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성공하면 일본을 따돌리고 256M D램 최초 개발이라는 신기원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7시간이 지나도록 100% 작동하는 반도체 웨이퍼가 나오지 않았다. 연구원들도 하나둘 실망스러운 표정이 감돌았다. 실패의 분위기가 짙어지던 순간 마지막 2개의 웨이퍼에서 2억 7000만 개 셀이 정확하게 작동하는 제품이 나왔다. 한국 반도체가 반도체 왕국 일본에 일격을 날린 이날은 경술국치 84년이기도 했다. 김광호 당시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은 “적어도 D램 기술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평등했던 구한말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는 것을 선언할 수 있어 뿌듯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D램을 포함한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그야말로 일본 기업 천하였다. 1991년에는 NEC·도시바·히타치가 글로벌 1·2·3위를 나란히 휩쓸었다. 64M D램에서도 삼성전자의 개발 시계는 일본보다 빨랐지만 256M D램부터는 양과 질 모두에서 일본을 확실히 앞섰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삼성전자가 도쿄선언으로 반도체 사업을 본격화한 지 약 11년 만에 거둔 쾌거였다. 첨단 기술이 요구되는 반도체 산업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에 삼성전자가 업계 선두로 올라선 배경에는 과감한 결단들이 있다. 반도체는 여느 산업보다 축적된 노하우가 중요해 후발주자가 선도 기업을 따라잡기 어려운 분야다. 정기적으로 대규모 투자가 요구되고 ㎚(나노미터·10억분의 1m) 단위로 제품을 설계하는 기술은 하루이틀에 성숙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도체 기술력은 제품을 실제 생산하면서 경험적으로 쌓이는 측면도 있다. 삼성전자는 사업 초기부터 물량 공세를 펼쳤지만 후발 업체의 한계를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1983년 단 6개월 만에 첫 제품 64K D램을 개발했지만 손해만 쌓였다. 어렵게 제품을 개발했지만 일본 기업들과의 경쟁 속에서 원가보다 낮은 가격을 받고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건희 선대회장이 특단의 승부수를 던진 것은 이 같은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서였다. 선대회장은 투자와 개발 시간표를 과감히 미래로 돌려 차세대 제품에서 승부를 보기로 하고 상식을 뛰어넘는 투자를 단행했다. 한치 앞이 불투명한 경쟁 상황에서 수년 뒤 양산될 16M·64M·256M D램 개발에 최고 엔지니어들을 투입해 아낌없이 지원사격을 했다. 이들 제품은 이후 차례로 일본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선봉장이 됐다. 현장 엔지니어의 목소리를 최우선에 둔 것도 결실을 앞당기는 데 디딤돌이 됐다. 이 선대회장은 반도체 사업에 모든 것을 베팅하는 절박한 시기에도 기술 분야만큼은 전적으로 엔지니어들의 의견을 신뢰했다. 연구개발(R&D) 프로젝트의 가능성이나 목표 설정, 속도 조절 등은 현장의 뜻을 존중해 결정했다. 256M D램 개발 과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창규 당시 256M D램개발팀장은 전권을 갖고 프로젝트를 이끌었는데 선대회장이 관여한 것은 투자 규모나 시기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권한과 책임이 주어지자 연구원들도 밤낮없이 기술 개발에 전력투구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진출 초기 생산 현장에서 매일 이뤄졌던 ‘일레븐 미팅’이 대표적이다. 매일 오후 11시에 이뤄졌던 이 미팅은 현장 개발·생산 인력들이 하루 성과와 진척도를 당일 저녁 점검하고 종합 토론을 통해 이튿날 일정을 결정하는 식이었다. 수백 개 공정을 하나하나 검토해 해결책을 도출해내다 보니 시간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고단한 작업이었지만 현장 인력들은 매일 오후 11시 이를 반복하며 기술력을 쌓았다. 황 전 사장은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고 회의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다 보니 목소리가 잠겨 있을 때가 많았다”고 했다. 인재 최우선 정책도 삼성 반도체 신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공 요인이다. 최고를 고집했던 선대회장의 신념은 반도체 업계 선두 탈환 이후 30년간 1등을 유지하는 비결이 됐다. 인재 유치를 위해 ‘헤드헌터’를 자청하기도 한 선대회장은 “전자 산업에서 일본을 이기려면 반도체가 필수”라며 해외 인재들의 애국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반도체는 인류에 공헌하는 사업”이라며 사업 보국도 강조했다. 삼성 반도체 신화의 주역들인 황창규·진대제·권오현 박사가 해외의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고 귀국을 결심한 것도 선대회장의 끈질긴 설득 때문이었다. 송성수 부산대 교수는 “요즘 삼성이 톱다운식 의사 결정, 재무팀 주도 경영 판단이 보편화한 것과 달리 1990년대는 기술자들이 발언권을 갖고 토론하며 중요 결정에도 참여했다”며 “지속적 기술 향상이 중요한 반도체 산업에서 삼성은 총수의 결단과 지원으로 과감한 투자로 기술을 선점하고 1위에 오른 뒤에도 초격차를 유지하려 근성을 발휘해 수십 년간 왕좌를 지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
"개발자 한명 한명이 1인 기업…영광 잠시 접고 절실함 무장을"
산업 산업일반 2025.02.09 17:47:29삼성 반도체 신화의 주역 중 한 명인 임형규 전 삼성전자(005930) 사장은 삼성이 초격차를 다시 회복하려면 엔지니어 개인이 1인 기업 수준으로 일할 수 있는 업무 환경과 그에 걸맞은 보상 시스템이 선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삼성이 영광의 시간을 접고 절실함으로 재무장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엔지니어로 회사에 입사한 임 전 사장은 메모리 개발 총괄 임원으로 삼성의 D램 사업이 1위로 도약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바 있다. 2000년 사장으로 승진한 후 시스템반도체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등 신사업 개척을 이끌기도 했다. 임 전 사장은 최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반도체 사업을 ‘500마리 말들이 이끄는 레이스’에 비유했다. 그는 “반도체 기술력의 요체는 결국 사람”이라면서 “D램을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하위 500가지의 세부 기술마다 10명가량의 고급 인력이 요구돼 총 5000명의 기술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500마리 말 중 몇 마리만 뒤처져도 결승선에 빨리 도착할 수 없는 것처럼 500개 각 분야마다 최고 실력이 갖춰져야 1등을 할 수 있는 것이 반도체 사업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500마리의 말’ 레이스에서 1위를 하기 위해서는 엔지니어 개개인을 사내 벤처 기업으로 간주하고 그에 걸맞은 대우와 그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업무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설명했다. 임 전 사장은 “적어도 500개 기술 분야를 이끄는 인재들만큼은 일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창업해서 벤처하는 사람들을 보면 죽으라고 일을 하지 않나. 사내에 벤처가 1000개 이상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며 “이들이 벤처 기업 수준으로 보상받고 일하도록 업무 환경을 고안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반도체 업계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뜨거운 이슈가 된 반도체 연구 인력의 ‘주 52시간 근로 예외(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조항 신설에 대해서도 찬성 입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임 전 사장은 “집중적인 연구개발 과정이 불가피한 반도체 산업 특성에서 주 52시간 근무 제한은 한가하고 태평한 얘기”라며 “과거를 그대로 옮겨올 수는 없겠지만 삼성이 한창 1위로 치고 나갈 때는 ‘월화수목금금금’이 보통이었고 이는 확실한 보상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장기간 이어온 초격차에 따른 안정감이 조직 문화를 느슨하게 만들지 않았는지 반성할 필요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임 전 사장은 “약 30년간 세계 1위를 했다. 넉넉하게 잡아도 1992년부터 1등을 했으니 32년이 흘렀으니 오만해진 부분도 분명히 있다”며 “삼성을 초격차로 이끌던 당시 분위기와 마음을 모르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삼성에서) 대부분인데 과거의 영광은 잠시 접고 다시 한번 삼성의 도전 정신을 발휘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
"고객이 원하면 설계도 다 고쳐…SK 철학, HBM서 더 빛날 것"
산업 기업 2025.02.09 17:42:08“고객이 원하면 기존 D램의 설계 구조를 아예 다 뜯어내서 새롭게 고쳤습니다. 고객 제일주의가 SK하이닉스(000660) 모바일 칩의 성공 비결입니다.” 심대용 동아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SK하이닉스에서 LPDDR D램 연구개발(R&D)을 진두지휘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심 교수는 1995년 SK하이닉스 전신인 현대전자에 입사해 2021년까지 부사장으로 일하며 26년간 반도체 외길을 걸어온 R&D 전문가다. 그는 SK하이닉스에 황금알을 안겨준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차량용 반도체 사업 담당 등을 맡으며 신사업을 책임졌다. 특히 그는 SK하이닉스 모바일 D램의 산증인이다. 2009년부터 2014년까지 모바일 제품 그룹에서 LPDDR D램 개발팀장을 지냈다. 김용탁 SK하이닉스 최고기술책임자(CTO), 양예석 품질보증본부장과 ‘LPDDR 별동대’를 이끌었다. 당시 심 교수의 LPDDR D램 개발은 회사의 명운을 쥔 중대 프로젝트였다. 스마트폰이 인기를 모으며 날개 돋친 듯 팔려 LPDDR 시장이 급팽창했고, 출혈 전쟁을 불사하는 경쟁 업체를 제치려면 고성능 신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2005년 워크아웃을 졸업한 SK하이닉스로서는 매출을 극대화할 새로운 먹거리 역시 급선무였다. 심 교수는 팀장 시절 LPDDR2에서 소기의 성과를 올렸지만 더 큰 도약이 필요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세계 최대 스마트폰 회사에 LPDDR3를 공급해 SK하이닉스를 글로벌 메모리 ‘톱 티어’ 반열에 올려놓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하지만 장벽은 높았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한국에 출장 온 고객사 관계자를 붙잡고 LPDDR 협력 의사를 물었지만 SK하이닉스가 LPDDR을 만드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며 당시의 막막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심 교수가 선택한 전략은 ‘맞춤형’이었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고객사를 만족시키기 위해 요구 조건은 무조건 반영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기존 메모리 구조를 통째로 바꾸는 특단의 결정도 내렸다. 메모리반도체는 기성 제품으로 일정한 표준에 따라 만들기 때문에 구조를 바꾸면 설계도는 물론 생산라인 공정까지 처음부터 리셋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사업 수익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객의 목소리를 우선하며 네모난 칩에 기억 소자들을 ‘토끼 귀’ 모양처럼 배치하는 독특한 구조를 개발해 고객사의 ‘오케이’를 이끌어냈다. 심 교수는 “일반 메모리는 직사각형이지만 고객사는 정사각형 칩을 원했다”며 “경쟁사는 당연히 주저했고 사내에서도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끈질기게 매달렸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2013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LPDDR3가 나왔고 북미 시장에서 대히트를 쳤다. 그는 “고객사가 만족해 자신들의 연구소 내부에 SK하이닉스만의 연구 공간을 업계 최초로 내줄 정도였다”고 전했다. 심 교수는 현재 HBM과 같은 맞춤형 제품에서 SK하이닉스가 뛰어난 성과를 보이는 것은 예견된 일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소규모 개발 조직에 자율성을 주고 속도감 있는 개발을 모색하고, 고객사의 요구를 최대한 제품에 반영하는 문화는 SK하이닉스만의 자랑”이라며 “향후 LPDDR은 물론 차세대 커스텀 시장에서도 SK하이닉스의 철학이 빛을 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
44만시간 담금질…'K메모리 신화' 일군 반도체맨
경제·금융 정책 2025.02.09 17:37:35인공지능(AI) 혁명 등 미래 산업을 논할때 결코 한국은 빠지지 않는다. 산업의 쌀인 반도체 혁신에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가 선도 기업이기 때문이다. 1974년 삼성전자는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사들여 반도체 사업의 닻을 올렸다. 이병철 삼성전자 창업 회장은 9년 뒤 ‘도쿄선언’을 통해 반도체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모두가 무모한 도전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실제로 당시 한국의 인구, 국민총생산(GNP), 내수 여건은 반도체 사업을 하기에 턱없이 역량이 부족했다. ★관련 시리즈 4·5면 44만 6000시간, 51년이 흐른 현재 삼성·SK 쌍두마차가 이끄는 한국 반도체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서울경제신문이 9일 입수한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의 지난해 12월 ‘세계 팹 전망’ 보고서를 보면 올해 말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 능력은 8인치 웨이퍼 환산 기준 월 421만 장, SK하이닉스는 196만 장에 달한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 중 독보적인 1·3위다. 양사를 합치면 전 세계 칩 생산의 17%를 차지하고 삼성은 2위인 대만 TSMC보다 70만 장이나 많은 생산 능력을 갖춘다. 한국 반도체는 엔지니어들 특유의 열정과 근면, 정교함이 더해져 경쟁사들을 압도했다. 반도체맨들은 24시간 불 꺼지지 않는 공장을 묵묵히 지키며 잔혹한 메모리 치킨게임과 일본 수출 규제 등 숱한 위기를 뚫고 성장했다. 최근 삼성의 기술력이 주춤하지만 SK하이닉스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선도해 반도체의 ‘코리아 미러클’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두 회사는 때로 경쟁하고 때로는 힘을 합쳐 세계 최고 기업에 올랐다”며 “정부와 정치권이 조금만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모바일 D램 수율 99.99%의 기적…고용량 LPDDR3 세계 첫선
산업 기업 2025.02.09 16:31:58SK하이닉스 본사인 경기 이천 캠퍼스의 반도체 공장 ‘M10’. 이곳은 20년 전인 2005년부터 가동된 8인치 웨이퍼 환산 기준 월 10만 장 규모의 생산 시설이다. M10은 비교적 최근 설립된 M14·M16 등 사업장 내 다른 공장보다 생산 규모와 설비 수준이 작고 낮은 편이다. 그러나 이곳은 SK하이닉스의 모태이자 혼이 서려 있는 상징성을 지닌다. 2005년 하이닉스반도체 시절 워크아웃(기업 개선 작업)부터 국내 시가총액 2위 기업으로 오르기까지 회사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건물이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최근 고대역폭메모리(HBM)로 메모리 시장 내 게임의 법칙을 바꿨다. 하지만 지금의 영광이 있기 전 SK하이닉스가 세계 최초로 작성한 또 하나의 역사가 있다. 2013년 ‘삼성을 추격할 수 없는 만년 2위’ 딱지를 떼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LPDDR3’ D램을 M10에서 생산하며 글로벌 반도체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이야기다. ◇LPDDR의 시작, ‘다물(多勿)’ 프로젝트=LPDDR D램은 저전력 메모리다. PC나 서버에 쓰이는 DDR D램에 비해 전력 소모가 적은 것이 특징이다. 스마트폰·태블릿·노트북 PC 등에 쓰이는 대표적인 모바일 D램이다. SK하이닉스는 2007년부터 LPDDR을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점찍었다. 제품 개발은 2년 뒤 ‘다물 프로젝트’라는 작전명과 함께 본격화한다. 다물은 고구려 말기 “옛 영토와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쓰던 고구려 말이다. 고난을 이기고 SK하이닉스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임직원들의 비장한 각오가 담긴 프로젝트였다. 당시 회사 마케팅본부는 다물 프로젝트를 위해 모바일 D램 ‘별동대’를 꾸렸다. 한 업계 관계자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서 “LPDDR 시장을 연구하고 제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별동대에 전권을 줬다”면서 “최고경영자(CEO)마저도 이 부서의 결정을 거스르기 힘들었을 만큼 기동력과 힘이 막강했다”고 술회했다. 극자외선(EUV)과 HBM 등에서 별도 조직을 운영하면서 특화 기술을 키운 방식이 이때 이미 시행된 셈이다. SK하이닉스가 LPDDR 별동대를 만든 배경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당시 D램 업계에서 키몬다·엘피다 등이 심각한 출혈을 불사하면서도 시장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벼랑 끝 전술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SK하이닉스에는 경쟁사를 물리치기 위한 신무기가 절실했다. 2007년 애플이 새로운 모바일 세상을 연 것도 중대 전환점을 맞게 했다. 애플은 ‘아이폰’으로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꿨고, 삼성전자가 갤럭시 시리즈로 스마트폰 시장에 참전했다. 2010년대 고용량 LPDDR D램의 시간도 함께 막이 올랐다. ◇“미션: 1만 개 제품 중 불량 1개…일주일 밤새우며 대응”=SK하이닉스 연구원들은 비장한 각오로 LPDDR 개발에 돌입했다. 하지만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거는 기대는 ‘제로(0)’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LPDDR 시장을 휘어잡고 있었던 기업은 일본 엘피다였다. 외국 스마트폰 업체들은 엘피다 이외 다른 D램 제조사가 공급망에 진입하는 것을 상당히 꺼렸다. 모바일 D램을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회사의 제품을 썼다가 불량이 나오면 누가 책임을 질 거냐며 의구심을 피력하기 일쑤였다. 공급망 진입에 극악한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 일본의 한 휴대폰 제조사는 “1만 개 중 1개의 불량, 즉 99.99%의 수율을 만족해야 SK하이닉스의 LPDDR D램을 써줄 수 있다”고 통보했다. ‘미션 임파서블’과 다를 게 없는 요구였지만 SK하이닉스 임직원들은 회사 생존과 재무 건전성 회복을 위해 ‘헝그리 정신’으로 총력전을 폈다. M10 공장의 엔지니어들은 일주일 밤을 온전히 지새우면서 LPDDR 웨이퍼의 휨 현상을 확인하고 수율을 올렸다. 결국 까다로운 일본 고객사의 퀄 테스트를 통과하며 LPDDR2를 납품하기 시작한 SK하이닉스는 이 분야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2012년 하이닉스는 든든한 날개를 얻기도 했다. SK그룹이 하이닉스를 인수한 것이다. 최태원 SK 회장은 계열사 사장들의 반대에도 “하이닉스를 초우량 반도체 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그룹 역량과 개인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하겠다”며 뚝심 있게 회사의 혁신을 지원했다. 결국 SK하이닉스는 2013년, 다물 프로젝트 개시 4년 만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고용량 8Gb LPDDR3를 개발해 세계 최대 스마트폰 업체의 선택을 받았다. 같은 해 LPDDR4 개발은 물론 최근에는 LPDDR5T와 24GB 용량의 5X 양산까지 ‘세계 최초’ 타이틀을 잇따라 거머쥐면서 LPDDR 최강자 자리에 올랐다.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HBM에서 일대 성공을 거둔 배경에는 기적 같은 LPDDR 개발의 유산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한 반도체 업계 핵심 관계자는 “기민한 조직의 대응과 고객사 요구를 어떻게든 만족시키려는 임직원들의 절실함이 SK하이닉스의 오늘을 있게 한 DNA”라고 평가했다. -
"기술은 돈 아닌 열정으로 만든다"…고성능 향한 정의선의 집념
산업 기업 2025.02.02 19:11:37지난해 12월,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 중국에서 희소식이 들려왔다. 현대자동차의 고성능 전기차(EV) 아이오닉5N이 ‘2024 중국 올해의 차 어워즈’에서 올해의 고성능차로 선정된 것이다. 아이오닉5N은 지난해 8월 말 중국 시장에 출시됐는데 단 3개월 만에 세계적인 고성능 브랜드를 제치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211점. 2위인 메르세데스·AMG C63 S E 퍼포먼스(142점)를 압도적인 차이로 이겼다. 앞서 8월에는 미국 자동차 전문지 카앤드라이버가 현대차의 고성능 전기차 아이오닉5N을 ‘2024 올해의 전기차’에 선정했다. 1986년 미국에 처음으로 수출된 엑셀을 두고 “붙어 있는 건 다 떨어지는 차”로 조롱받던 현대차가 최고 성능을 갖춘 차 브랜드로 거듭난 것이다. 아이오닉5N은 전 세계 자동차 브랜드들에 고성능 전기차가 나아갈 방향성도 제시했다. N브랜드는 정의선 회장의 열정으로 시작했다. 2000년대 현대차·기아는 고리타분한 차였다. 티뷰론과 제네시스 쿠페가 있었지만 젊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현대차는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2012년 파리모터쇼에서 세계 최고의 모터스포츠 대회 중 하나인 월드랠리챔피언십(WRC) 재도전을 선언하고 2013년 독일 알체나우에 현대모터스포츠법인을 설립했다. N브랜드 설립을 주도했던 박준우 N브랜드매니지먼트실 실장은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티뷰론을 타면서 ‘회사가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정 회장님께서 WRC에 나간다고 선언했을 때 ‘N브랜드’에 대한 보고서를 컨펌 받았다”고 설명했다. N브랜드의 첫 계획은 2013년 12월. 2020년까지 7년의 장기 계획이었다. N브랜드는 2019년 WRC에 참가한 지 6년 만에 한국 브랜드 최초로 제조사 부문 종합 우승을 차지하며 모터스포츠 무대 정상에 섰다. 2020년 WRC에서도 제조사 부문 종합 우승, 지난해에는 사상 처음으로 드라이버 부문에서 우승하며 양산차를 기반으로 한 고성능 기술이 세계 수준에 와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박 실장은 전 세계 고성능 전기차의 이정표를 세운 아이오닉5N의 개발을 두고 “열정으로 기술을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고성능 전기차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고 했다. 첫 시작은 2020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포르쉐가 타이칸을 내놓고 전기 고성능 스포츠카 브랜드 리막은 1888마력의 전기차 ‘C Two’를 선보였다. 박 실장은 “고성능 전기차들이 독일 뉘르부르크링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모터가 과열됐습니다. 안전모드로 진입합니다’는 경고등이 떴다”며 고성능에 열을 올리던 전기차들의 허상을 짚었다. 박 실장은 “‘우리가 이런 차를 왜 만들어야 하지’라는 의문과 함께 무조건 성능 저하가 없는 고성능 전기차, 그리고 감성을 집어넣은 전기차를 만들자고 기획했다”고 회상했다. 박 실장은 “2.2톤이라는 거대한 중량을 ‘어떻게 하면 더 가벼운 차로 인식되고 날렵하게 움직이게 할까’라는 고민을 하며 서스펜션의 암(arm)이라든지 현가하질량(현가장치 아래에 걸려 있는 물체들의 총질량)에 대한 부분까지 고민하며 설계를 했다”고 말했다. 아이오닉5N이 최고의 전기차로 평가받는 배경에는 내연기관 고성능 차의 배기음과 엔진 변속까지 느낄 수 있는 감성적인 세팅에 있다. 박 실장은 “연구소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개발한 사운드를 녹음하고 변속 패턴까지 적용했다”며 “고성능 차를 원하는 고객들이 뭘 원하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었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기술적인 발전을 이뤘다”고 설명했다. 아이오닉5N의 복합 출력은 641마력(hp)다. 하지만 경쟁사들은 1000마력 이상의 전기차를 만들어야 아이오닉5N의 성능을 따라잡을 수준이다. 박 실장은 모터스포츠에 대한 도전과 아이오닉5N의 개발은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조직에 열정을 불어넣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박 실장은 “(고성능 차의)기술을 개발하려면 비용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라며 “하드웨어가 어느 정도 받쳐주면 그것을 요리하는 소프트웨어, 즉 개발하는 사람의 열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어 “우리 연구소에는 고성능을 연구하는 인원들이 충분히 있고 그 친구들도 자기가 만들고 싶은 차를 만드는 열정이 있다”고 했다. 박 실장은 정 회장의 열정이 있기 때문에 N브랜드와 현대차의 고성능 기술 역량이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 회장이)현대자동차 기술 발전의 선봉장이고 회사에서 진취적으로 완전히 지원(Fully support)을 하고 있어 뛰어들 수 있었다”며 “기술은 그렇게 개발이 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현대차는 올해 고성능 분야에서 한 단계 더 진화한다. N브랜드에 이어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는 고성능 라인업 ‘마그마’를 출시한다. 박 실장은 “고성능이라는 브랜드가 이제 회사 전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다”며 “마그마도 이제 조직적으로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도요타도 하는데 우리도 할 수 있다" 전동화 시대 연 하이브리드 엔진
산업 기업 2025.02.02 19:10:52“도요타도 하이브리드차를 만드는데 우리도 만들 수 있습니다.” 정몽구 전 현대차그룹 회장의 일성으로 2004년 현대차 남양연구소에는 ‘하이브리드 개발실’이 신설됐다. 모여든 연구원만 33명. 현대차에서는 이들을 ‘독립투사’라고 표현했다. 당시 연구개발을 담당했던 연구원들은 “모두가 인생을 걸고 매달렸다”고 회고했다. 지난달 23일 경기도 화성시 현대차그룹 남양연구소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문상훈 현대자동차 전동화구동실장은 당시 개발 상황에 대해 “하이브리드에 대한 정 회장님의 의지가 엄청나게 강했다”고 말했다. 알파 엔진 개발에 성공하며 기술 독립을 하던 1990년 초. 세계 자동차 시장은 독자 엔진 하나로 대응할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90년 미국의 걸프전으로 국제유가가 치솟았고 시대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기후변화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자동차 산업의 요람이던 유럽과 미국에서 커지기 시작했다. 1992년 6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된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에서 채택된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들에 순차적으로 온실가스 감축을 요구했다. 친환경 차 시장을 싹 틔운 기후변화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1997년 일본 교토에서 개최된 기후변화협약 제3차 당사국총회는 친환경 차 시대가 온다는 것을 알렸다. 온실가스 감축이 의무화됐고 2005년부터 자동차의 배출가스 규제가 예고됐다. 현대차가 엔진 개발로 추격하고 있던 일본 업체들은 여지없이 더 빨리 갔다. 교토의정서가 채택되던 1997년 일본의 도요타자동차가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차량 프리우스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도요타는 누구도 따라할 수 없게 자사의 직병렬형 하이브리드 시스템에 다수의 특허를 걸었다. 결국 현대차는 알파 엔진 프로젝트처럼 독자적인 하이브리드 시스템 개발에 돌입했다. 현대차는 이번에도 내부의 불신을 맞닥뜨렸다. “일본이나 독일에 가서 기술이나 배워서 오라”는 자조감이 팽배했다. 현대차는 1995년 제1회 서울모터쇼에 프로 엑센트를 기반으로 하이브리드 콘셉트카 ‘FGV-1’을 내놓을 정도로 하이브리드차 양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2000년에는 베르나 하이브리드, 2004년에는 클릭 하이브리드를 한정 생산하기도 했다. 문제는 효율과 양산 능력이었다. 문 실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도요타가 100가지 정도의 시스템을 쫙 나열해 놓고 수년간의 검토를 거쳐 가장 좋은 시스템을 내놓았다는 소문이 있었다”며 “일본 업체들은 당시 유럽 업체들보다 전력 변환 기술이 상당히 뛰어났고 잘할 수 있는 시스템을 하이브리드라고 판단하고 개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도요타의 특허를 피해 성능은 필적하는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만들어야 했는데 기술력은 부족했다. 문 실장은 “2004년 클릭 하이브리드를 만들 때만 해도 (모터·인버터 등) 파워일렉트릭(PE) 시스템을 해외 업체에서 공급받아 사용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기술적 난제와 양산 능력, 수익성의 함수에 갇힌 현대차는 2006년께 하이브리드 시스템 개발을 위해 선택의 길에 놓이게 됐다. 미쓰비시에서 엔진과 변속기 기술을 받아왔던 것처럼 하이브리드 시스템에 들어갈 핵심 부품을 해외에 의존하느냐, 자체 개발하느냐였다. 실제로 유럽 업체들이 공동 개발을 타진해오기도 했다. 현대차의 선택은 독자 개발이었다. 고안한 시스템은 도요타와 달리 ‘엔진-엔진클러치-구동모터-변속기’로 구성돼 클러치를 통해 엔진과 모터가 상황에 따라 구동하는 병렬형 구조다. 두 개의 모터에 유성기어 형태의 파워스플릿디바이스(PSD)를 사용하는 도요타의 직병렬형 구조보다 간결해 양산에 성공한다면 제조 경쟁력도 더 높았다. 문 실장은 “당시에는 진짜 이것을 양산할 수 있을까, 엔진과 모터 사이를 오가는 클러치가 얼마나 부드럽게 붙을 수 있을까가 핵심이었다”며 “개발 초기만 해도 클러치를 설계 및 튜닝하시는 분들이 어마어마하게 고생을 했다”고 설명했다. 현대차는 2011년 5월 세계 최초로 병렬형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탑재한 쏘나타 하이브리드를, 기아는 K5 하이브리드를 출시했다. 공인 연비가 1ℓ당 21㎞, 당시 도요타 캠리 하이브리드(19.7㎞/ℓ)보다 연비에서 앞섰다. 하이브리드차 기술 독립은 현대차그룹을 세계 3위의 완성차 기업으로 위상을 끌어올렸다. 온실가스 감축 규제 대응 기술로 각광받았던 유럽의 클린 디젤 엔진들은 2015년 배기가스 조작 사건인 ‘디젤 게이트’에 휩싸이며 몰락했고 친환경차 시장은 하이브리드차와 전기차로 재편됐다. 2011년 국내 1만 6000대, 해외 1만 5000대 수준이던 현대차의 하이브리드차는 디젤 게이트 이후 급격히 성장해 2024년 전체의 10%가 넘는 73만여 대의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문 실장은 남양연구소에서 현대차그룹이 올해 세계에 출시할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 TMED-Ⅱ의 실물을 본지에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기존의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모터와 변속기가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배기량이 큰 가로 배치 엔진과 함께 엔진룸에 넣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날 확인한 TMED-Ⅱ의 크기는 외부에 있던 발전기가 시스템 안으로 들어왔지만 크기는 기존의 8단 변속기 크기 수준으로 작아졌다. 이 때문에 고배기량 엔진과도 매칭이 가능하다. 문 실장은 “이제는 엔진과 클러치가 붙을 때 이질감이 거의 안 느껴질 것”이라며 “축적된 노하우가 그대로 반영됐기 때문에 (하이브리드 기술은) 저희가 감히 세계 최고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차의 하이브리드 시스템 개발은 험로였다. 1997년 도요타의 1세대 프리우스가 나온 뒤 28년, 본격적인 개발에 돌입한 지 약 20년 만에 세계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는 수준까지 기술적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더 주목해야 할 지점은 현대차가 하이브리드 시스템 개발로 인해 전기차(EV) 기술 발전의 기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독자 개발은 기술과 경험의 축적을 낳고 다음 단계로 이어진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현재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현대차의 EV 기술의 기초가 됐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미국 시장에서 테슬라에 이어 전기차 판매 2위를 기록하며 기술력을 입증하고 있다. 문 실장은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전기동력 부품까지 다 고려해 직접 개발한 모터 시스템들이 들어가 있다”며 “PE 시스템에 대한 노하우가 전기차에도 쌓였고 전기차에서 우리가 선도적인 지위를 차지해야겠다는 방향이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
"반드시 성공 일념, 주 7일 밤을 새며 개발"…'은마 5000채' 자본 R&D 쏟아부어 엔진 독립
산업 기업 2025.02.02 19:10:07“언제까지 남의 엔진만 들여와서 쓸 것입니까.” 1983년 여름.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직원들을 향해 “회사가 차를 만들어온 지 20년이 다 돼가는데 어떻게 우리 엔진이 없느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1967년부터 자동차를 만든 현대차는 1975년 수출을 시작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내연기관 자동차의 핵심인 엔진과 변속기는 일본 것이었다. 수출 시장에서는 ‘무늬만 한국 차’라는 비아냥뿐만 아니라 돈도, 자동차 개발의 주도권도 모두 일본이 쥐고 있었다. 1981년 현대차가 발표한 ‘X카 프로젝트’는 당시 현대차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쓰비시와 기술제휴를 기반으로 한 이 프로젝트를 위해 현대차는 미쓰비시에 선불금 6억 5000만 엔을 주고 순판매가의 3%를 기술료로 지불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현대차의 엑셀 한 대를 출시할 때마다 엔진 5000엔, 섀시 2500엔 등 1만 4500엔, 차 원가의 10% 이상을 로열티로 지불했다. 연간 30만 대 수출이 목표였는데 당시 돈으로 미쓰비시에 로열티만 43억 5000만 엔, 당시 환율로 100억 원을 지불했다. 현대차 전체 연구개발(R&D)비의 절반이 넘었다. 정 명예회장의 분통은 현대자동차그룹이 30년 뒤 독일의 폭스바겐, 일본의 도요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완성차 기업이 되는 초석이 됐다. 1983년 9월 현대차는 미쓰비시의 그늘에서 나오기 위한 ‘신(新)엔진 개발 계획’을 시작했다. 정 명예회장의 주도로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의 엔지니어 이현순 박사(현 중앙대 이사장)를 영입했고 현대차 엔진개발실은 1984년 기술개발실로 확대됐다. 정 명예회장은 울산연구소와 별도로 용인 마북리 일대에 엔진과 변속기를 개발하기 위한 마북리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렇게 현대차의 최초 독자 엔진,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 엔진 개발 역량을 성취한 알파 엔진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이 이사장(전 현대차 부회장)은 “그 당시만 해도 미쓰비시가 하라는 대로만 하고 기술 더 받아오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국제무역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신(新)자유주의 기조에 맞춰 각국은 문호를 낮추며 시장을 열고 있었다. 동시에 서로 잘하는 것을 하자는 ‘비교우위론’이 팽배했다. 이 이사장은 엔진 개발 때 만난 정부의 한 고위 관료의 말을 전했다. 그 고위 관료는 “한국 자동차 회사는 박사가 필요 없다”고 단언했다고 한다. 일본과 독일에서 기술을 우리 자동차 기업에 전수를 해주니 엔진과 변속기를 우리가 개발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 이사장은 “그 국장이 저에게 ‘큰 착각을 하고 있어요. 대한민국 자동차 회사에서 박사가 할 일이 없으니 (대학교) 교수로 가시라’고 하더라”면서 일화를 전했다. 자동차는 독자 기술을 개발할 역량도, 부품사 인프라도 없으니 기술을 받아서 쓰자는 주장이었다. 정부마저 이랬으니 개발 초기 현대차 내부의 반대 목소리는 정 명예회장의 개발 의지를 압도할 수준이었다. 울산 연구소장조차 “니들이 무슨 실력으로 미쓰비시를 뛰어넘느냐. 돈만 날리고 너희들은 안 될 거야. 웃기지 마”라고 비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엔진 개발은 엄청난 자금을 소모했다. 1986년 8월 시제품이 내구 시험에 들어갔는데 10월이 되자 열과 압력을 이기지 못한 엔진이 일주일에 한 대씩 깨졌다. 엔진 제작비는 한 대당 2000만 원. 1980년대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30평대 한 채에 달하는 돈이었다. 엔진 개발은 내부의 견제를 넘어 내란이 일어날 수준이었다. 회사 내에 소위 ‘친(親)미쓰비시’ 인물들이 신엔진개발실장이던 이 이사장이 독일 출장을 간 사이 그의 책상을 치워버리고 ‘보직 해임’을 한 것이다. 그리고는 엔진 개발 대신 미쓰비시의 엔진 성능을 개량하는 프로젝트를 맡겼다. 정 명예회장은 미국에서 이 이사장을 영입할 때 “세계 시장에 나가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엔진을 개발해 다오”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부의 반대 세력은 미쓰비시의 그늘을 벗어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정 명예회장은 노발대발하며 이 이사장의 복귀를 지시했고 다시 엔진 개발을 위한 바퀴가 돌아갔다. 현대차가 엔진 개발에 목을 맨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1980년대 고도성장으로 1가구 1대, ‘마이카(My car)’ 시대가 도래하고 수출이 40만 대를 돌파할수록 미쓰비시로 나가는 돈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1988년 현대차가 800억 원의 최대 순익을 내고도 450억 원을 미쓰비시에 로열티로 줘야 하는 형국이었다. 이 이사장은 “강제도 아니었고 주 7일 일했다”고 말했다. 출근은 오전 7시, 퇴근은 오후 11시였다. 이 사장은 “밤을 샌 적도 많았다”며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엔진 개발에 속도가 붙자 미쓰비시는 급기야 1989년 현대차에 “로열티를 절반으로 깎을 테니 이현순을 해고하라”고 제안했다. 정 명예회장은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 이사장은 이에 대해 “이미 우리는 1989년 엔진 개발을 끝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알파 엔진 프로젝트는 1991년 엔진 대량생산에 돌입하며 5년 6개월 만에 완료됐다. 324개의 엔진과 188개의 변속기, 약 150대의 시험 차량을 투입했다. 현대차는 1000억 원. 당시 은마아파트 5000채에 달하는 자금을 투입해 엔진과 변속기 독립을 이뤄냈다. 현대차의 엔진 기술 독립은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이 독일·일본과 견줄 자동차 강국, 수출 대국으로 크는 밑거름이 됐다. 현대차는 알파 엔진을 시작으로 세타, 람다, 타우 등 저배기량에서 고배기량 엔진에 이어 하이브리드 엔진을 만들어냈고 소비자가 요구하는 모든 차량을 만들 기반을 갖췄다. 1990년 67만 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2024년 현대차·기아를 합쳐 전 세계에서 약 730만 대, 매출액이 280조 원 규모의 세계 3위 자동차 거인으로 성장했다. 그사이 자동차 산업은 국가의 사실상 기간산업이 됐다. 현대차그룹의 1차 협력사 237개의 매출액(2023년 기준)도 90조 원, 협력 업체들의 생산 유발효과만 238조 원, 취업 유발효과가 연간 60만 명에 달한다. 이 이사장은 모든 인프라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현대차의 노력이 지금의 자동차 강국을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이 이사장은 “당시 우리와 함께 큰 부품사가 50개는 넘을 것”이라며 “부품도 국산화해야 가격 경쟁력도 생긴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가 세계시장으로 나가려면 부품까지 다 만들 수는 없었다”며 “설계를 그려주고 자체 노하우도 오픈해 부품을 대량생산하도록 지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정주영 '도전' 정몽구 '품질' 정의선 '혁신'…K자동차 이끈 '3개의 엔진'
산업 기업 2025.02.02 18:06:45“현대차는 미쓰비시, 기아차는 마쓰다, 대우차는 오펠이 기술을 다 주는데 자동차 회사에서 박사가 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현대자동차,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 자동차 엔진 ‘알파 엔진’ 개발을 이끈 이현순 중앙대 이사장(전 현대차 부회장)은 최근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개발 당시 정부 관료가 전한 말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그때 우리가 엔진 개발을 하는 게 우주선 띄우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하더라”고 회고했다. 이 이사장과 본지가 만난 곳은 강남구에 위치한 ‘현대모터스튜디오 서울’. 1층에는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에서 기술을 받아 현대차가 1968년 조립 생산한 모델 ‘코티나 마크2’가 전시돼 있었다. 독일의 폭스바겐, 일본의 도요타자동차보다 40년 늦은 1967년에 시작한 현대차는 이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3위의 완성차 기업으로 성장했다. 추격의 액셀은 엔진 기술을 독립한 1991년에 밟았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강남 아파트 5000채 값을 투자한 연구개발(R&D)을 밀어붙이며 알파 엔진을 탄생시켰다. 이 과정에서 부품·소재 업체들도 함께 성장하며 세계적인 자동차 산업 생태계가 형성됐다. 정주영 회장의 집념, 이 이사장을 비롯한 당시 연구원들의 열정이 현대차가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던 독일·일본 기업들을 추월하는 ‘스푸트니크 모멘트’를 만들어낸 것이다. 1월 23일 현대차 기술의 심장부 경기도 화성시 남양연구소에는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 ‘TMED-II’ 여러 개가 수백 시간을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현장 연구원은 “실제 주행 환경보다 훨씬 가혹한 조건을 통과해야 하는 시험”이라고 말했다. 정몽구 회장의 ‘품질 경영’으로 탄생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성능과 효율 측면에서 곧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 찾은 현대차 강남 사옥의 ‘N브랜드’ 기획 현장은 열정으로 가득했다. 이곳에서는 정의선 회장이 주도한 N브랜드와 고성능 제네시스가 기획되고 있다. 박준우 N브랜드매니지먼트 실장은 “우리의 임무는 상상과 용기, 현대차 기술의 선봉이자 라이트하우스(등대)”라고 강조했다. N브랜드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은 전기차 아이오닉5N에 이어 제네시스의 고성능 ‘마그마’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대한민국 무역수지는 516억 달러(약 75조 2500억 원). 자동차 산업이 631억 달러(약 92조 원)를 벌어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이사장은 “지금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부품사들도 대부분 현대차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더 높이 올라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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