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체인 대만 TSMC가 미국의 수출 제재를 위반하고 중국 화웨이에 칩을 공급한 혐의로 최대 10억 달러(약 1조 5000억 원)의 벌금을 부과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반도체 기업들의 미국 내 생산 확대를 압박하기 위해 수출 규제 위반 조사와 관세 위협을 총동원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8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 상무부는 최근 TSMC가 제조한 반도체가 제재 대상인 중국 화웨이에 전달된 정황을 포착하고 조사에 착수했다. 복수의 소식통은 해당 칩이 중국 반도체 설계 업체 소프고가 화웨이를 대신해 주문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해당 칩은 화웨이의 인공지능(AI) 반도체 ‘어센드 910B’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랜드연구소의 레나트 하임 연구원은 “TSMC는 최근 수년간 소프고에 AI용으로 설계된 약 300만 개의 칩을 공급했다”며 “미국 기술이 포함된 칩이 제재 대상 기업에 전달될 위험을 인지하고도 이를 방치한 것은 명백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로이터는 위반 거래액의 최대 두 배까지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법규에 따라 벌금 규모가 최대 10억 달러에 이를 수 있다고 전했다. TSMC는 “2020년 9월 이후 화웨이에 제품을 공급한 적이 없으며 미 정부의 조사에 성실히 협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로이터는 이번 조사가 미국과 대만 간 관세 갈등이 고조된 시점과 맞물려 이뤄졌다고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산 수입품에 32%의 관세를 부과하며 현재는 반도체를 예외로 두고 있지만 조만간 관세 부과를 검토 중이라며 업계를 압박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외국 기업들의 미국 내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보조금 대신 관세로 압박을 가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라고 거듭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 보조금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나는 TSMC에 돈을 주지 않았다. 대신 ‘미국에 공장을 짓지 않으면 25%, 50%, 심지어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말했다”며 “멍청한 반도체지원법 없이도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기조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도 비슷한 압박이 가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키우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바이든 정부 시절 미 상무부와 각각 47억 4500만 달러, 4억 5800만 달러 규모의 보조금 계약을 체결하고 미국 공장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보조금 지급을 미루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를 주요 압박 수단으로 활용할 경우 두 기업은 보조금 없이도 사실상 미국 내 생산을 늘려야 하는 처지로 내몰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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