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기의 바로미터 역할을 하는 '닥터코퍼(Dr Copper)' 구리 가격이 국제유가와 함께 폭락세를 이어가면서 올해 세계 경기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유가 하락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가격경쟁에서 비롯된 것과 달리 구리 값 폭락은 세계 경기, 특히 수요의 40%를 차지하는 중국의 경기둔화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더 위협적인 신호라는 지적도 있다.
14일(현지시간) 블룸버그에 따르면 구리 값은 이날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전일 대비 5.2% 하락한 톤당 5,548달러에 마감하며 지난 2009년 7월 이후 5년반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장중 가격은 톤당 5,353달러까지 밀렸다. 6일 이후 연속 하락세를 보인 6거래일 동안 낙폭은 9.7%에 달했다. 이날 뉴욕상품거래소(COMEX)에서 3월물 구리 가격도 전일 대비 5.3% 급락한 파운드당 2.5055달러에 거래를 마쳐 종가 기준으로 2009년 7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최근 6개월간 국제유가가 60% 가까이 하락한 데 이어 산업의 기초원자재인 구리 값마저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자 시장에서는 세계 경기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영국 일간 가디언 등 외신에 따르면 일부 시장 전문가들은 구리 값이 유가보다 경기와 더 밀접하게 연계된다는 점을 들어 최근의 구리 가격 추이가 세계 경기침체의 전조일 수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
투자금융사인 BKCM 설립자 브라이언 켈리는 "구리 가격 하락은 유가처럼 주요 생산국(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간 가격전쟁 탓으로 돌리기 어렵다"며 "이는 결국 세계 경제가 둔화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소시에테 제네랄의 로빈 바르 금속리서치 대표도 "구리 가격 하락은 세계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섰으며 예상보다 둔화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경고했다.
이날 구리 가격이 낙폭을 키운 데는 특히 13일 세계은행(WB)이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을 종전의 3.4%에서 3.0%로 하향 조정한 여파가 컸다. 구리는 스마트폰에서 자동차까지 다양한 산업에 활용되는 원자재라는 점에서 세계 경제둔화 전망이 구리 수요 감소에 대한 투자자들의 우려를 키운 것이다.
특히 구리의 최대 수요국인 중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가 7.5%에서 7.1%로 낮아진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외신들은 설명했다. 전 세계 구리의 40%를 소비하는 중국의 성장둔화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투자자들이 구리에서 발을 빼고 있다는 것이다. 삭소뱅크의 상품전략 책임자 올레 핸슨은 마켓워치에 "이날 런던거래소의 구리 값 하락은 중국 상하이의 구리선물 가격 급락에서 촉발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시장조사 기관인 CRU그룹은 앞으로 중국의 수요가 점점 더 둔화하면서 중국의 구리 수요 증가율이 지난해 5.5%에서 올해 4%까지 낮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2002년부터 10년 동안 중국의 평균 수요 증가율인 10%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구리 가격의 이 같은 추이는 다른 주요 산업용 금속으로도 확산되는 모습이다. 이날 LME에서 니켈 가격은 11개월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고 납 가격은 톤당 3.4% 하락한 1,766.50달러를 기록해 2년반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글로벌 광산 관련 기업 주가도 줄줄이 하락하고 있다. 이날 영국 런던증시에서 다국적 광물 업체 글렌코어 주가는 9.28% 하락했으며 구리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중소 광산업체인 카즈미네랄스 주가는 무려 26%나 급락하기도 했다. 미국증시에서도 세계 최대 구리 및 금광개발 회사인 프리포트맥모런 주가가 10.93%나 떨어졌다. 다만 파이낸셜타임스(FT)는 구리 채굴업체들이 당장 생산라인을 정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광산 문을 닫는 것은 원유나 가스 생산량을 일시적으로 줄이는 것보다 어렵고 과거 사례로 볼 때 구리 값이 반등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 시장에서는 최근의 구리 가격 동향이 세계 경기의 펀더멘털이 반영됐다기보다는 일시적인 시장 패닉에 불과하다며 크게 우려할 수준은 아니라는 반박도 나온다. 캐피털이코노믹스의 글로벌 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 줄리언 제섭은 "구리 가격 흐름은 지난 수년간의 하락세를 감안할 때 추세선을 벗어나지 않았다"며 "주요 저항선인 6,000달러가 무너지면서 일시적인 공황상태를 겪고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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