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9월 위기, 갈수록 심화-물가 15% 앙등·생산 3.8% 위축'. 1960년 8월1일자 서울경제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창간호부터 경고음을 발동할 만큼 우리 경제는 어렵디 어려웠다. 천연(天緣)이었을까.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구렁텅이에 빠진 한국 경제는 서울경제신문이 태어난 후 기지개를 켜며 성장 가도를 달렸다. 동반 성장 55년 뒤안길의 깔려 있는 이야기들을 짚어본다.
1947년 서울경제연구회가 창간 시발점
서울경제신문 창간이 처음 논의된 시점은 해방 직후. 30대 초반의 은행 실무책임자들이 1947년 1월16일 결성한 서울경제연구회가 시발점이다.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조사부를 창설한 장기영(당시 조사부 차장)과 김봉진 서울신문 조사부장을 중심으로 각 은행의 조사·연구 분야 핵심인력 8명이 수요 모임을 열어 신생 조국의 경제 건설에 대해 토론을 펼친 끝에 자연스레 경제신문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였다. 당장 신문사를 차릴 형편이 못 되던 젊은이들은 대안으로 경제동인지 '경제평론'을 발간하며 꿈을 키워나갔으나 장애물에 맞닥뜨렸다.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사람이 최우선'…백상의 인재관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린 급박한 상황에서 피난 수도 부산의 한국은행 장기영 조사부장이 느닷없이 '개인대출을 시행하자'고 나섰다. '학자와 문인·교수들이 굶어 죽어가면 전쟁에 이겨도 나라를 재건하는 비용과 시간이 몇 배나 들 것'이라는 장 부장의 설득으로 전무후무한 '중앙은행의 개인대출'이 이뤄졌다. 한은은 급하게 추린 300여명에게 5만원(요즘 가치 약 1,500만원 해당)씩 개인대출을 내줬다. 대출금을 갚은 사람들은 극소수였다지만 인적 자산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백상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서울경제신문은 사람을 중시하는 가치 풍토에서 잉태돼 싹을 키웠다.
'때가 찼다' 1960년 마침내 창간
1960년, 때가 찼다. 회원 중 장관이 배출되고 백상은 한국은행 부총재를 거쳐 경영부실 상태인 조선일보를 정상화한 뒤 한국일보를 창간, 정상을 향해 내달리던 터. 국내 최고 재벌의 경제신문 공동 창간 제의도 마다하며 기회를 찾던 백상은 마침 4·19 학생혁명의 결과로 신문발행업이 인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자 경제신문 창간을 실행에 옮겼다. 신행 신문의 제호는 백상의 자문역이었으며 한국일보의 경제논설도 맡았던 서울경제연구회 회원들의 제안에 따라 '서울경제신문'으로 정해졌다. 국내 최초의 제대로 된 경제정론지 서울경제는 이렇게 탄생했다.
스포츠 지면도 국내 최고
1960년대 말까지 국내 최고의 스포츠 지면은 서울경제의 몫이었다. 모든 신문들이 4면, 기껏해야 8면을 제작하던 시절, 서울경제만 스포츠에 1개 면을 전면 할애했다. 당시 체육계 상황을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로도 통한다. 서울경제 체육부는 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여자 400m·800m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북한 선수단 소속 신금단 부녀의 눈물의 상봉을 특종 보도해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서울경제에서 1961년 12월부터 9년 동안 다져진 스포츠 면이 발전한 매체가 바로 '일간스포츠'다. '스포츠한국'의 창간 주체도 서울경제신문이었다.
후발 경제신문도 서울경제가 모태
서울경제 스포츠 면이 각광 받자 주간지인 일요신문(요즘 일요신문과는 별개 회사)은 1963년 스포츠신문을 선보였는데 그 이름이 '일간스포츠'였다. 그러나 생각대로 잘 안 됐는지 '일일경제신문'으로 바꾸고 서울경제와 비슷하게 지면을 만들었다. 1965년에는 제호를 '현대경제일보'로 또다시 변경했고 1980년에는 '한국경제신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1966년 창간된 매일경제신문도 서울경제와 연관이 있다. 매일경제의 고(故) 정진기 창업주는 서울경제신문 창간 멤버로서 전매청 출입기자로 근무한 뒤 독립해 매일경제신문을 세웠다.
노무현·이명박 대통령도 인연
서울경제의 장기 연재 칼럼 '경제교실'은 시대의 대세였다. 고시나 대기업 취직의 필수 관문으로 여겨졌다. 상고를 나와 독학으로 고시를 준비한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공식석상에서 "경제는 서울경제의 '경제칼럼'으로 공부했다"고 말했다.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은 "경제교실을 공부해 행시(7회) 수석을 차지했다"고 털어놨다. 이명박 대통령은 현대건설 사장 재임시 서울경제의 월례 정기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하며 학계에 얼굴을 알렸다.
서울경제를 가장 많이 활용한 박정희
서울경제를 가장 많이 활용한 리더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밝혔던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였다"는 발언의 배경이 1967년 신년호에 자세히 남아 있다. 고(故) 박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신년 공동기자회견이 아니라 서울경제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한국 경제는 복지 자본주의'라고 강조했다. 국책연구소를 만들며 부원장으로 추천된 모 교수에 대해 "그 사람 서경에 기고한 칼럼 잘 읽고 있다"고 칭찬했고 바로 원장직을 맡겼다고 전해진다. 1966년 신년호의 휘호는 박 대통령이 신문사 이름을 적은 신년 휘호를 보낸 유일한 사례로도 꼽힌다.
1969~1972년 3년9개월간의 석간
창간 이래 조간이던 서울경제는 1969년 1월21일 석간으로 전환했다. 1972년 10월3일자부터 조간으로 돌아올 때까지 3년9개월간 석간으로 발행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주식 시장이 점차 중요해지면서 신문이 나오자마자 증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석간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앞섰다. 일간스포츠 창간을 앞두고 인쇄시설의 부하 집중을 피하고 서울경제를 찾는 독자가 많아 한국일보와 조·석간을 나눌 요량이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신군부의 억압에 통한의 강제 폐간
정권 장악을 위해 언론을 길들이려던 신군부는 언론 통폐합을 강행하며 서울경제를 폐간시켰다. 1980년 11월25일 강제 폐간을 앞두고 각계각층은 '서경이 없어지면 한국에서 경제신문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우려했으나 신군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시 장강재 회장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서도 버텼으나 '한국일보와 서울경제신문 중 택일하라'는 강압에 시달렸다. 서울경제신문 종간호는 최고의 신문을 떠나보내는 학계와 재계의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서울경제의 강제 폐간을 조사했던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초 '국가의 배상 책임'을 권고한 바 있다.
'주식 갖기 운동' 등 외환위기 탈출 앞장
창간 이래 강제 폐간과 복간의 곡절을 겪으면서도 서울경제는 국가 이익에 소리 내지 않고 기여한 적이 많다. 해외 유수 언론 통신사들은 한국 내 제휴 대상으로 서울경제를 골랐다. 뉴스의 신뢰도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국교 수립 이전부터 한국과 중국·일본·몽골 등이 참여하는 국제 세미나를 개최하며 중국이 한국을 남조선이 아니라 한국으로 부르는데도 기여했다. 외환위기 직후 전국민주식갖기운동을 펼쳐 IMF 외환위기 조기 졸업을 거들었다. 경제위기에 짓눌려 있던 시절 전개된 이 운동은 고(故) 김대중 대통령의 비상한 관심 속에 진행돼 초기 가입자들에게 고수익을 안겨줬다.
/권홍우 선임기자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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