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4분기 일본 경기를 기대 이상의 속도로 견인한 것은 기업들의 설비투자다. 지난해 4월 소비세율 인상 이후 가계소비가 아직 뚜렷하게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가파른 엔화 약세 덕에 높은 실적을 올린 기업들이 '아베노믹스'에 호응하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8일 내각부에 따르면 앞서 속보치에서 0.4% 증가에 그친 것으로 잠정 집계됐던 1·4분기 기업 설비투자는 전 분기 대비 2.7%나 뛰어오른 것으로 최종 집계됐다. 연율로 환산하면 무려 11%에 달한다. 이는 앞서 지난달 31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이 1,200여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비투자 계획 조사에서 올 회계연도(2015년 4월~2016년 3월) 투자액이 전년 대비 10.5%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 것과 부합하는 수준이다.
개인소비가 여전히 부진한 상황에서 아베 신조 정권이 일본 경제의 성장세를 이끌기 위해 기댈 곳은 현금 '실탄'을 두둑하게 보유한 기업들뿐이다. 아베노믹스가 초래한 엔화 약세의 덕을 고스란히 본 기업들이 그동안 쌓아뒀던 자금을 국내 투자에 쓰기 시작하면서 경기 견인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4월 소비세율 인상과 엔화 약세에 따른 물가 상승으로 급격히 위축된 개인소비는 올 1·4분기에도 전 분기 대비 0.4% 증가에 그치는 미미한 수준으로 아직 본격적인 회복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지난 4월 가계 평균 소비지출은 전년 동기 대비 1.3%, 전월 대비로는 무려 5.5%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아베 총리도 이 같은 점을 의식해 기업들에 투자를 거듭 독려하고 있다. 2일 일본 최대 재계단체인 게이단렌 정기총회에 참석한 아베 총리는 "기업들의 수익이 공전의 기록을 올리고 있다"며 "이제 대담한 투자에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기업들에 집중적으로 요구해온 임금인상이 가시화하자 이제는 대규모 설비투자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최근 후생노동성 발표에 따르면 4월 물가 상승을 감안한 실질임금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0.1% 상승해 2년 만에 플러스로 돌아섰다. 아직 미미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임금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을 앞지르면서 '소득증대→지출증대→생산증대'로 이어지는 경기 선순환에 대한 기대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셈이다. 실제로 4월 전체 가계소비지출은 마이너스를 기록한 반면 임금근로자 세대의 소비지출은 0.5%의 증가세를 보였다. 전반적인 가계소비 부진에도 불구하고 기업에 종사하는 개인의 소비는 회복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이 주축이 된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아베 정권도 성장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달 말까지 아베 정부가 마련할 중장기 재정건전화 계획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적자감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기보다는 실질성장률을 2% 이상으로 끌어올려 GDP를 확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 예정이다.
다만 일본 경제가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가계소비가 아직 부진한데다 글로벌 경기도 둔화하는 상황에서 기업들의 투자심리가 꺾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날 내각부가 별도로 발표한 5월 체감경기지표는 가파른 엔저에 따른 원자재 비용부담 증가 등을 이유로 기업 부문의 상승세가 꺾이면서 6개월 만에 하락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캐피털이코노믹스의 이코노미스트들의 분석을 인용해 "2·4분기에는 성장률이 둔화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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