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임병식 중국 탕산해운대학 초빙교수
연재 중
일본, 일본인 이야기
24개의 칼럼 #경제
  • 일본, 일본인 이야기
    올해 10월 26일은 경주 APEC 회의에 가려 조용히 지나갔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10·26은 늘 각별한 기억을 불러낸다. 1909년 이날, 대한의군 안중근 중장은 일본 초대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저격했다. 70년 뒤 같은 날, 또 다른 육군 중장 출신 김재규는 자신을 중앙정보부장으로 발탁한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했다. 정확히 70년을 사이에 둔 두 사건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1979년 12월 12일자 아사히신문에는 이러한 기사가 실렸다. “안중근이 처형 직전 일본 헌병 치바 토시치에게 써준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유묵이 한국으로 반환된다.” 일본에 있던 안 의사 유묵이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었다. 지금 이 유묵은 서울 남산의 안중근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그로부터 다시 19년 뒤인 1999년에는 일본 미야기현 즈이간지(瑞巌寺) 앞마당에 있던 ‘와룡매’가 이식돼 남산 안중근기념관으로 옮겨왔다. 유묵과 와룡매가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과정은 한·일 양국의 비극과 화해가 얽힌 역사이기도 하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9시 55분, 사형집행 5분 전 치바에게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고 쓴 글을 건넸다. 군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당연한 의무라는 뜻이었다. 처음 치바는 여느 일본군처럼 안 의사를 적대했지만, 5개월 동안 그의 인품과 동양평화사상에 감화돼 극진히 보살폈다. 안 의사는 “너도 나도 군인으로서 한 일일 뿐이니 부끄러워 말라”며 마지막 선물을 남긴 것이다. 전쟁에서 패한 뒤 고향 미야기현으로 돌아간 치바는 유묵과 영정을 집안에 모시고 평생 추도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내가 그 일을 이어받았다. 치바 유족들은 안 의사 탄생 100주년인 1979년 유묵 반환을 제안했고, 1980년 8월 유묵은 한국에 도착했다. 약지가 잘린 손바닥 낙인이 선명한 유묵이 광복 이후 한국 땅을 밟기까지는 이렇게 길고 낯선 여정이 있었다. 한국 독립군과 일본 헌병의 이야기는 미야기현 다이린지(大林寺)의 사이토 주지에게 전해졌다. 그는 1981년 사찰 내에 ‘위국헌신 군인본분’ 비석을 세우고 지역 주민들과 추도 법회를 열기 시작했다. 이후 올해까지 44년 동안 단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일본 땅에서, 자신들의 ‘국부’를 죽인 조선 독립운동가를 위해 법회를 이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의 사이토 주지는 『내 마음의 안중근』에서 우익들의 협박과 비난을 감수해야 했던 과정을 담담히 적었다. 지금도 그는 일본 전역을 순회하며 제국주의 일본을 비판하고 동북아 평화를 역설한다. 책 속에는 안중근을 향한 한 일본인의 깊은 존경이 배어 있다. 그럼 와룡매는 왜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이는 다이린지 사이토 주지와 즈이간지 히라노 주지의 교분에서 비롯됐다. 즈이간지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던 센다이 번주 다테 마사무네가 재건한 사찰이다. 절 마당에 있는 와룡매는 다테가 조선을 떠나며 가져간 전리품으로, 본래 창덕궁 선정전 앞에 있던 나무였다. 와룡매는 400년 동안 일본 땅에서 뿌리내렸다. 안 의사의 행적에 감화된 히라노 주지가 반환을 결심하면서 와룡매는 후계목 형태로 1999년 서울로 왔다. 언론은 “400년 만의 귀환”이라며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 유랑의 끝에는 역시 안중근이 있었다. 김훈의 소설 『하얼빈』은 안 의사가 왜 이토를 죽였는지를 담담하게 복기한다. 안 의사는 검찰 조사와 재판에서 “이토는 대한의 주권을 찬탈한 원흉이자 동양평화를 해친 자”라며 “대한의군 사령관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개인적 이유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전쟁 중 적국의 수괴를 처단했다는 당당한 선언이었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오늘날 유럽연합(EU)을 연상케 하는 수준 높은 구상이었다. 한·중·일 3국이 뤼순항을 공동관리하고, 청년들로 구성된 공동 군대를 만들며, 중앙은행과 공동 화폐까지 창설하자는 내용이었다. 유묵과 와룡매의 귀환, 그리고 일본에서 이어지는 추도 법회에는 이렇게 깊고 복잡한 사연이 스며 있다. 비록 일부일지언정 일본인들의 참회와 연대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를 감상적인 화해의 미담으로만 소비할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의 결연한 희생을 기억하며 과잉 민족주의의 자기 위안을 넘어설 지혜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몇 해 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단지동맹비 앞에 섰을 때, 손가락을 잘라 맹세했던 12명의 결의가 떠올랐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유묵의 귀환도, 와룡매의 회귀도, 일본 땅의 추도 법회도 가능했다. 또 한 번 조용히 10·26이 지나갔다.
    2025.11.07 16:45:28
    10·26의 또 다른 이야기, 안중근 의사
  • 일본, 일본인 이야기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부부는 왜 같은 성(姓)을 쓸까. 부부가 성이 같은 경우는 일본에서도 드물다. 한데 두 사람은 성이 같은 것은 물론이고, 남편이 아내 성을 따랐다는 점에서 궁금증을 유발한다. 우리나라도 부부가 합의하면 자녀는 엄마 성을 따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흔치 않고, 더구나 남편이 아내 성을 따라 바꾸는 경우는 없다.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일본 민법은 “부부는 같은 성(姓)을 써야 한다”고 법으로 강제하고 있다. 남편 성이든, 아내 성이든 선택은 부부 권한이다. 다만 서로 다른 성을 유지한 채 혼인신고는 할 수 없다. 결국 한쪽 성으로 통일해야 한다. 일본은 주요 선진국 중 유일하게 부부동성을 의무화한 나라로써 항상 논쟁거리다. 현실에서는 대략 95% 이상 아내가 남편 성으로 바꾼다. “아내가 남편 성을 따른다”가 일반적이며, “남편이 아내 성을 따른다”는 아주 예외적이다. 이러니 다카이치 총리 부부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와 다카이치 타쿠(高市 拓) 부부는 결혼과 이혼, 재혼을 반복했다. 이들이 처음 결혼한 2004년은 남편(당시 야마모토 타쿠)은 중의원 신분이었지만 아내(다카이치 사나에)는 중의원 4선 도전에 실패해 실의에 빠졌을 때였다. 둘 다 주목받는 정치인이라서 당시에도 화제였다. 이때는 이들도 일반적인 경우를 따랐다. 다카이치 사나에가 남편 성을 따라 야마모토 사나에(山本早苗)로 바꿨다. 다만 정치 활동, 언론 노출, 선거 과정에서는 ‘다카이치 사나에’를 썼다. 정치하면서 그동안 쌓은 ‘다카이치’라는 인지도를 활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두 사람은 결혼생활 13년 만인 2017년 7월 이혼했다. 사유는 “정치적 견해 차이와 진로 차이”였다. 둘은 2021년 12월 재혼했다. 이번에는 남편 야마모토 타쿠가 아내의 성을 받아 ‘다카이치 타쿠’로 변경했다. 현행법에 맞춰 누군가는 바꿔야 하는데, 남편이 바꾼 것이다. “왜 부부가 같은 성씨를 갖게 되었나?”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답은 혼인신고 자체가 안 되는 현행법을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러면 왜 이번에는 남편이 바꿨을까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다카이치 총리 부부는 그 이유를 공식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공개된 정보와 정치적 맥락을 토대로 추론하자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첫째, 정치적 이유다. 재혼한 2021년은 다카이치 사나에가 자민당 총재 경선에 나서면서 전국구 정치인으로 떠오른 시기다. ‘다카이치 사나에’라는 이름 자체가 ‘정치 브랜드’였다. 만약 남편 성(야마모토)으로 바꾸면 유권자들에게 혼선을 주고 선거 관리도 복잡해진다. 일본 여성 정치인 가운데 상당수는 법적으로는 남편 성이지만, 선거·의정 활동에서는 원래 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이유 때문이다. 둘째, 상징성이다.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른 건 일본 사회 기준에서 보면 ‘역전된 선택’으로, 가치관의 전환을 뜻한다. 일본 언론이 ‘철의 여인’으로 부르는 다카이치 총리의 정치적 위상을 감안하면, 남편이 뒤에서 조용히 지지하는 모습은 ‘성역전(性逆轉)’의 시대적 상징으로 읽힌다. 실제로 남편 다카이치 타쿠는 “나는 스텔스 남편으로, 아내의 정책 추진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돕겠다”고 밝혔다. 일본 언론은 그를 ‘보이지 않는 조력자’로 묘사했고, 직접 요리를 하고 집안일을 챙긴다는 기사도 이어졌다. 셋째, 현실적 고려다. 남편 타쿠는 뇌경색 후유증으로 정치 일선에서 한발 물러선 반면 아내는 국가를 이끄는 위치에 올랐다. 이제는 남편이 아내를 뒷받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이 된 것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2024~2025년 자민당 총재 선거, 2025년 10월 일본 최초 여성 총리까지 올랐다. 커리어 중심축이 누구에게 있는지 고려하면 남편이 성을 바꾸는 게 합리적 선택이다. 결국 “둘 중 누가됐든 바꿔야 했고, 정치적으로 전국구 인지도를 지닌 다카이치를 위해 남편이 ‘다카이치’를 택했다”가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그만큼 이번 결정에는 실용적 판단이 깔려 있다. 끝으로 재혼 당시 나이다. 두 사람 모두 60대였다. 60대는 젊은 신혼부부처럼 ‘집안 어르신’이 호적을 좌우하는 나이가 아니다. 당사자들 의지에 따라 정치적 전략을 우선한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일본에는 ‘무코요시(婿養子)’로 불리는 제도가 있다. 아들이 없는 집안에 사위가 양자로 들어가 장인 집의 성을 잇는 관습이다. 그러나 이는 주로 상공인 가문에서 가업을 잇기 위한 제도였고, 정치인 부부의 선택과는 성격이 다르다. 다카이치 부부의 경우는 전통보다는 당사자의 의지와 정치적 상황이 우선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례는 일본 사회에 미묘한 파장을 던졌다. ‘부부동성’ 제도가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는 나라에서, 남편이 아내 성을 따랐다는 사실은 젠더 감수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여론조사에서도 일본 국민 절반 이상이 ‘부부별성(夫婦別姓)’ 제도 도입에 찬성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 정치권의 반대는 여전하다. 역설적으로 부부동성 제도의 대표 사례가 다카이치 총리 자신이 된 셈이다. 결혼과 이혼, 재혼, 그리고 다시 하나의 성으로 이어진 이들 행보는 단순한 사생활을 넘어 일본 사회의 변화와 전통이 충돌하는 단면을 보여준다. 다카이치 부부의 ‘같은 성’은 일본 사회에 던지는 작은 파문이자, 변화의 신호로 읽힌다. 다카이치 총리의 파격적인 행보가 한일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한다.
    2025.10.30 16:01:02
    남편이 아내 성을 따른 다카이치 총리 부부의 '특별한 선택'
  • 일본, 일본인 이야기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사토’ ‘스즈키’ ‘다나카’ 같은 이름을 자주 본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지만 일본의 성씨는 유독 자연과 농경, 그리고 귀족 문화의 향취가 짙다. 부부의 성이 같은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 취임은 일본 성씨의 기원과 제도적 배경에 새삼 시선을 모으게 한다. 일본 성씨에는 왜 자연 지형이 많을까. 한국·중국과 달리 두 글자 성씨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또 결혼하면 같은 성씨를 갖도록 한 배경은 무엇 때문일까. 일본 여행에서 흔히 접하는 궁금함이다. 다카이치 총리의 남편 이름은 다카이치 타구(高市 拓)다. 본명은 야마모토 타쿠(山本 拓)였으나 2021년 재혼하면서 부인과 같은 성씨로 바꿨다. 부부가 같은 성씨를 쓰는 일본 문화도 생소하고, 남편이 아내를 따라 성씨를 바꾸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일본 10대 성씨는 사토(佐藤), 스즈키(鈴木), 타카하시(高橋), 타나카(田中), 이토(伊藤), 와타나베(渡邊), 야마모토(山本), 나카무라(中村), 고바야시(小林), 가토(加藤)다. 밭(田)과 산(山), 나무(木), 마을(村), 다리(橋), 숲(林) 등 자연과 농촌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흔한 사토의 등(藤) 또한 등나무다. 일본 성씨가 농경문화 또는 자연과 밀접함을 알 수 있다. 또 ‘마을 가운데’(나카무라·中村), ‘나무 아래’(기시다·木下), ‘강 주변’(와타나베·渡?), ‘밭 가운데’(다나카·田中), ‘작은 샘’(고이즈미·小泉) 등 스토리텔링 요소도 보인다. 자연 친화적인 성씨와 밋밋한 일본 음식을 떠올리자면 이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만행을 저지른 민족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일본 성씨에 자연 지형이나 농경문화가 녹아든 유래는 이렇다. 고대 씨족 사회에서 성씨는 귀족이나 무사, 제관의 전유물이었다. 후지와라(藤原), 미나모토(源本), 타이라(平) 등 엘리트 씨족만 성(姓)과 씨(氏)를 가졌다. 농민과 평민들은 마을명이나 지명에 근거해 아무렇게나 불렀다. 평민들까지 성씨를 갖게 된 건 메이지유신 직후다. 메이지 정부는 19세기 말부터 성씨를 강제했다. 세금 징수와 징병에 필요한 호적·인구조사 제도를 정비할 목적이었다. 이 때 많은 이들이 “밭 한가운데 살았다(田中)”, “다리 아래 거주했다(高橋)”, “강기슭에 살았다(渡邊)”며 주변 환경을 빌려 성씨를 만들었다. 이러니 대부분 성씨는 160년 안팎에 불과하다. 스즈키(鈴木)는 제관 가문에서 유래한 성씨다. 방울(鈴)은 제사를 지낼 때 필수 도구였다. 후지(藤)가 들어간 성씨는 유독 많은데 사토(佐藤), 이토(伊藤), 가토(加藤), 사이토(斎藤), 엔도(遠藤), 후지와라(藤原) 가문이 방계임을 암시한다. 후지와라는 일본 고대·중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 ‘보랏빛 등꽃이 핀 넓은 들(고귀함과 평온함이 공존)’을 뜻하는 이름부터 럭셔리하다. 후지와라 가문과 후손들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8~12세기) ‘섭정’과 ‘관백’ 직위를 독점하며 천황가 외척으로서 군림했다. 일본 정치에서 귀족 독점 체제는 후지와라 가문에서 시작됐다. 자연 지형과 생활환경, 귀족·무사 계통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일본의 성씨는 사회 구조와 역사,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이 응축된 결과다. ‘돕는다(佐)’와 ‘등나무(藤)’를 결합한 사토는 귀족의 위세가 평민 사회로 스며든 사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분 질서가 무너질 때 가장 많이 생긴 성씨가 ‘김(金)·이(李)·박(朴)’이다. 이들 성씨에 왕족과 사대부가 많았기에 하층민들은 ‘김·이·박’ 족보를 사들여 신분 변화를 꾀했다. 무사 계통 미나모토(源)와 타이라(平), 조정 귀족인 타치바나(橘)도 4대 씨족으로 꼽는다. 여기에서 파생된 성씨가 퍼지면서 일본의 지명과 문화, 지역 정체성을 형성했다. 예컨대 미나모토씨에서 아시카가(足利) 가문, 타이라씨에서 히라노(平野) 가문이 나왔다. 두 가문은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막부를 지탱한 핵심 세력이었다. 일본에서 부부가 같은 성씨를 쓰는 독특한 제도는 민법 750조에 근거한다. 법은 “부부는 혼인 시 동의한 성씨를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결혼한 부부의 95%가 남편 성씨를 따르고 있다. 결혼해도 각자 성씨를 유지하는 우리와 다르다. 제도가 만들어진 배경 역시 흥미롭다. 메이지 정부는 호적 제도와 가족 단위 존속·상속을 중시했다. 가족이 단일 성씨를 공유하면 행정상·재산상·세제상 효율적이라는 판단이었다. ‘부부동성’은 근래에 개인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제약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각자 성씨를 유지해야 한다”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다카이치 총리 부부는 시대를 앞서간 셈이다. 이는 일본에서 성씨 제도와 젠더·사회 인식 변화가 교차점에 있음을 상징하는 사례다. 지역마다 다른 성씨가 분포하는 것도 특이하다. 홋카이도는 사토와 사사키, 간사이는 나카무라와 야마다, 규슈는 마에다와 마쓰오가 흔하다. 사회 구조 변화에 기인한 결과다. 사토와 스즈키가 귀족 혈통을, 다나카와 나카무라가 농민과 평민을 상징한다면 이는 일본 사회의 축소판이다. 일본은 귀족 피가 섞인 사토와 신사 제관의 후손 스즈키, 평민 다나카가 공존하는 나라다. 그 안에는 신분과 계층, 종교와 문화가 녹아 있다. 이름 하나에도 천년의 역사가 스민 나라, 이것이 일본이다. 어쩌면 일본을 이해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열쇠는 ‘이름’이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고귀한 땅에서 일찍 싹튼 생명’이다. 이름처럼 한일관계에 좋은 싹이 틀지 기대해 본다.
    2025.10.27 13:04:06
    ‘역사·문화 축소판’ 일본의 성씨
  • 일본, 일본인 이야기
    매년 10월 초가 되면 한국 언론은 국정감사 보도에 몰두하지만, 세계 언론의 시선은 노벨상 수상자 발표에 쏠린다. 인류가 만든 상 가운데 가장 영예로운 것으로 꼽는 노벨상은 수상자 개인을 넘어 한 나라의 학문 수준과 국력의 척도로까지 여겨진다. 올해 일본 열도는 특히 들떠 있다. 오사카대 사카구치 시몬 교수가 생리의학상을, 교토대 스스무 키타가와 교수가 화학상 수상자로 호명되었기 때문이다. 단숨에 두 명이나 배출하면서 일본의 역대 수상자는 모두 31명으로 늘었다. 한국의 2명과 대비된다. 노벨상 수상자 숫자보다 눈여겨봐야 할 건 내용이다. 일본 노벨상 수상자 31명 가운데 87%인 27명이 과학 분야 수상자다. 기초과학에서 일본이 얼마나 탄탄한 기반을 갖췄는지 웅변한다.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일본의 기술력은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미 우리는 2019년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 때문에 심각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 등 반도체 핵심 소재가 막히자 한국 산업은 휘청거렸다. 그제야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의 중요성을 깨닫고 기술 자립에 나섰지만, 여전히 격차는 크다. 일본의 기초과학은 왜 뿌리가 깊을까. 해답은 새로운 문물을 빠르게 흡수하는 역사적 전통, 기술자와 과학을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가고시마의 센간엔 정원에서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근대적 실험을 시도했다. 그는 일본 최초로 반사로를 세우고 고품질 쇠를 뽑아 증기선과 대포를 만들었다. 동아시아가 칼과 조총에 머무르던 시대에 대포와 증기선은 전쟁 패러다임을 바꾼 첨단무기였다. 나리아키라는 개명 군주로 추앙받았고, 시마즈 가문은 메디치 가문에 비견될 만큼 존경을 받았다. 1865년 그가 선발해 영국에 보낸 유학생 17명은 훗날 사쓰마 번의 근대화 역사에 주춧돌이 되었다. 가고시마 중앙역 광장에 서 있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 동상은 160년 전의 그 순간을 기린다. 사쓰마와 적대 관계에 있던 조슈 번도 뒤지지 않았다. 조슈 번은 이토 히로부미를 포함 5명을 영국에 파견했다. 이들이 귀국해 메이지유신의 핵심 세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같은 시기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고 스스로 문을 걸어 잠궜다. 조선과 일본의 기술력 격차는 그때 이미 벌어지기 시작한 건 아닌지 모른다. 나가사키 데지마도 중요한 단서다. 네덜란드는 218년 동안 일본과 독점적 교역을 하며 서양 학문을 전했다. 난학(蘭學)이라 불린 이 흐름을 통해 서양 의학과 천문학, 화학, 지리학이 일본에 들어왔다. 당시 일본 지식인들은 ‘외부의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받아들였다. 메이지 정부가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바로 이런 호기심과 학습 열정을 제도화한 사례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년 10개월 동안 미국과 유럽 12개국을 돌며 의회 제도, 교육, 철도, 통신, 은행 시스템을 직접 조사했다. 공업화의 길도 이때 닦였다. 일본 근대국가의 설계도는 해외 현장에서 얻은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초과학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심수관을 비롯한 조선 도공들은 대부분 그곳에 정착했다. 조선에서 천대받던 자신들이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대우를 받으며 기술자로 존중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수백 년을 이어온 중소기업이 많은 것도 이런 장인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2002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고이치 역시 대기업 연구소 소속이 아니라 중소기업 시마즈제작소의 평범한 엔지니어였다. 그는 작은 회사지만 엔지니어로서 인정받고 세계적인 성과를 냈다. 시마즈제작소가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이 바로 시마즈 가문의 실험장이었던 센간엔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긴 시간의 축적이 과학기술로 이어졌다. 올해 수상자인 사카구치 교수는 학계의 비주류였다. 그러나 호기심을 좇아 묵묵히 기초연구를 이어왔다. 키타가와 교수 역시 수십 년 동안 한 분야만 파고들었다. 단기 성과주의가 아니라 인내와 호기심의 산물이다. 반면 한국은 산업화 이후 ‘빨리빨리’ 문화와 단기 성과 중심의 연구 풍토가 강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R&D 예산을 대폭 삭감함으로써 기초과학 기반까지 뒤흔들었다. 우리는 응용 기술과 제조업에서는 강했지만 기초연구 기반은 여전히 허약하다. 2018년 일본의 수출 규제로 뒤늦게 ‘소부장 자립’을 외쳤으나, 일본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그 길을 걸어왔다. 간단치 않은 시간을 뛰어넘으려면 어떠해야 할지 자명하다. 기초과학은 단기간에 결실을 맺지 않는다.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견디며, 긴 안목으로 연구자의 호기심을 존중할 때 뿌리 내린다. 일본은 그 과정을 수백 년 동안 축적해 왔다.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단기 과제가 아니라 50년, 100년을 내다보는 백년대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연구자에게 실패할 자유를 보장하고, 호기심을 존중하는 생태계는 절실하다. 반일은 쉽지만, 극일은 험난하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불편한 시선으로만 바라볼 게 아니다. 백 년을 준비하는 자극으로 받아들이자.
    2025.10.15 20:34:47
    기초과학이 강한 일본
  • 일본, 일본인 이야기
    일본 정치가 또다시 안갯속이다. 자민당 총재가 곧 총리라는 일본 정치의 공식은 이제 깨지기 직전이다. 첫 여성 총리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앞에 둔 다카이치 사나에를 둘러싼 정국은 격랑으로 빠져들었다. 26년 동안 파트너였던 공명당이 등을 돌리면서 모든 계산은 틀어졌다. 도쿄 치요다구(우리의 여의도)에서는 “다카이치는 못 올라선다”는 찌라시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자민당은 전체 중의원 의석 465석 중 196석으로 단독 과반은 어렵다. 공명당 24석을 합쳐도 부족하다. ‘총재=총리’라는 등식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정치는 ‘단명 총리’의 무덤이다. 2006년 고이즈미 퇴임 이후 2012년 아베 신조가 재집권하기까지 6년 동안 총리만 여섯 번 바뀌었다. 하토야마,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 등 민주당 정권 총리들은 모두 단명에 그쳤다. 길어야 1년, 짧으면 몇 달짜리 돌려막기 총리였다. 의원내각제가 빚은 허약한 리더십, 뿌리 깊은 자민당 파벌정치가 주된 원인이다. 일본 총리는 늘 파벌의 눈치를 보고, 연정 파트너에게 표를 구걸한다. 다카이치가 직면한 상황도 다르지 않다. 설령 총리에 취임해도 그는 아소파 그늘에 있다. 연정은 일본 정치의 숙명이다. 1994년 선거제도 개편으로 중의원은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병립제로 선출한다. 이는 자민당의 절대 우위를 어렵게 만들었다. 자민당은 1999년부터 공명당과 불안한 동거를 시작했다. 지난 26년간 이어진 자민·공명 연정은 일본 정치의 상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공명당은 그동안 자민당의 정치자금 스캔들, 야스쿠니 참배, 극우적 언행을 경고해 왔다. 2023년 아베파의 비자금 스캔들은 결정타였다. 정경유착, 보고서 조작, 솜방망이 징계에 유권자들은 분노했다. 공명당은 ‘정치자금 투명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자민당에 제도적 개혁을 요구했지만 자민당은 귀를 닫았다. 오히려 다카이치는 정치자금에 연루된 인사들을 중용하고 극우 색채를 감추지 않았다. 공명당이 “더는 동행할 수 없다”며 문을 닫은 건 당연했다. 일본 정치가 ‘타협의 연속극’이 아니라 ‘불신의 희극’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그럼에도 자민당은 왜 무너지지 않는가. 답은 분명하다. 이익집단과 끈끈한 유착, 권력을 나눠 먹는 파벌 구조, 그리고 난립한 야권 때문이다. 일본 유권자들의 관성적 선택, “그래도 자민당”이라는 체념과 무관심도 자민당을 지탱한 요인이다. 차악의 정치, 파벌 정치가 자민당 장기 집권의 비결이다. 자민당은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전후 정치의 기묘한 산물이다. 그 사이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보냈다. 국제정세가 급변하는데도 자신들이 쌓은 성안에서 뒷걸음질 쳤다. 심하게 표현하면 자폐 정치다. 한국 보수 정치가 대구·경북이라는 성역에 안주하는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카이치가 보여주듯 자민당 안에서 극우 담론은 여전히 주류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과거사 부정, 혐한과 혐중 발언은 강성 지지층을 묶는 정치적 자산이다. 또 걸그룹과 코미디언, 탤런트 출신 정치인이 가세하면서 일본 정치는 ‘희화화’됐다. 정치와 예능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한국 정치는 일본과 다른 방식으로 황폐화했다. 대통령 단명은 없지만, 진영 대립과 적대 정치는 훨씬 치명적이다. 상대의 주장은 무조건 반대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어느 편이냐’가 판단 기준이 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여야는 처지를 바꿔 장외 투쟁에 나서고 국회는 길거리 확성기로 전락했다. 일본 정치가 코미디라면, 한국 정치는 상대를 궤멸하는 잔혹사다. 일본식 연정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있다. 귀를 열고 상대를 동반자로 대하는 정치 문화다. 하지만 일본식 연정은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도 교훈이다. 그렇다고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끝내 적대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과 일본 정치는 공통된 병을 앓고 있다. 정치의 품격이 실종됐다는 점이다. 일본은 극우와 희화화로, 한국은 적대와 혐오로 품위를 상실했다. 정치는 사회를 통합하는 매개다. 그러나 양국 모두 정치로 인해 오히려 사회는 분열하고 국민은 지쳤다. 일본 정치가 희망을 말하려면 정치자금과 권력 파벌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한국 정치가 미래를 열려면 적대와 혐오를 내려놓고 협치와 연정에 나서야 한다. 그럴 때 양국 정치도, 양국 관계도 진전된 방향으로 나아간다. 자민당과 공명당의 결별은 어떻게 끝을 맺을까. 일본 첫 여성 총리라는 정치 실험은 성공할까, 아니면 구태의 반복일까. 한국은 일본보다 12년 앞서 2013년 첫 여성 대통령을 배출했다. 그렇다고 한국 정치가 일본보다 12년 앞섰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주지하다시피 첫 여성 대통령은 탄핵으로 중도 하차했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다면 ‘처음’이란 수사는 공허하다. 정치는 사람의 일이고, 사회를 움직이는 근간이다.
    2025.10.11 15:57:04
    단명 총리, 자민당 독주는 왜?
  • 일본, 일본인 이야기
    추석(秋夕)은 귀향이고, 오봉(お盆)은 머무름이다. 한국은 고향 집으로 달려가고, 일본은 신궁 앞으로 긴 줄이 늘어선다. 명절을 맞는 한국과 일본의 풍경이다. 같은 뿌리에서 갈라졌으나 표현 양상은 사뭇 다르다. 한국은 귀향으로, 일본은 머묾으로 정체성을 드러낸다. 지갑 사정은 여의치 않아도 명절은 여전히 기다려진다. 올해 추석은 지독한 무더위를 지낸 뒤 끝이라 어느 때보다 반갑다. 추석에 다가갈수록 달도 부풀어 오를 것이다. 한민족 정체성을 담은 명절로써 추석만 한 게 없다. 이즘 귀성 행렬은 익숙한 풍경이다. TV 카메라는 주차장이 된 고속도로를 비추고 소요 시간을 생중계한다.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일본의 명절은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조상을 기리고 가족·공동체 유대를 확인한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그러나 표현 방식은 크게 차이 난다. 우리 명절 풍경을 먼저 보자. 양손에 선물 보따리를 들고 자녀들과 함께 설레는 표정으로 서성이는 서울역 대합실이 떠오른다. ‘매진’을 알리는 전광판 앞에서 애를 태우는 모습도 낯익다. 북새통을 이루는 고속도로 휴게소는 또 다른 삽화다. 장시간 운전에 지친 귀성객들에게 고속도로 휴게소는 쉼표 같은 곳이다. 나 역시 평소 2시간 반이면 가는 고향길을 5시간 걸려 갈 때면 반드시 들린다. 눈부신 설경과 황금빛 벼로 일렁이는 국도변 풍광도 정월과 팔월에 만나는 절경이다. 추석 때 주변 산은 성묘객들로 화사하다. 어릴 적 성묫길에 메뚜기 잡고 삘기를 뽑으며 가을 햇살 속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선명하다. 일본인은 새해 첫날, 집과 가까운 신사나 신궁에 간다. 도쿄 메이지 신궁에는 해마다 수십만 명이 몰린다. 새해 첫 참배인 ‘하쓰모데(初詣)’를 올리기 위해서다. 참배객들이 늘어선 모습은 장관이다. 이즈음 노점상(야타이) 행렬도 흥미로운 풍경이다. 다코야키와 오뎅 국물 냄새가 새해 차가운 공기를 달군다. 가정에서는 오세치(お節) 요리가 상에 오른다. 오세치 요리는 정월에 먹는 대표 명절 음식이다. 자손이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카즈노코(소금에 절인 청어알)와 장수를 의미하는 새우, 건강을 염원하는 검은콩, 기쁨을 뜻하는 다시마가 주된 요리다. 우리가 떡국을 먹으며 새해를 맞듯 일본인은 오세치를 즐긴다. 아이들에게 세뱃돈 오토시다마(お年玉)를 주는 풍습도 비슷하다. 조상을 만나기 위해 산으로 가는 우리와 달리 신사나 신궁을 찾는 일본, 가깝고도 먼 나라를 상징한다. 우리 추석에 해당하는 일본 명절은 오봉이다. 다른 점은 우리는 음력 8월 15일, 일본은 양력 8월 15일이다. 오봉 연휴는 대략 8월 13~17일까지다. 우리는 매년 9월 중하순 또는 10월 초에 추석이 찾아온다. 반면 오봉은 무더위가 한창일 때다. 명절 분위기는 우리가 훨씬 낫다. 대규모 귀성 귀경 행렬이 벌어진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가 그렇듯 일본 또한 신칸센은 3개월 전에 매진된다. 숙박업소 요금도 덩달아 폭등한다. 대학 때 일본인 홈스테이 가정에서 오봉을 지냈는데 열기가 대단했다. 지금도 일본 소도시에서는 집집마다 등불을 켜고 조상의 영혼을 맞는다. 절집 종소리가 울리면 마을은 봉오도리(盆踊り) 춤판에 휩싸인다. 참가자들은 둥근 원을 그리며 북소리와 손뼉 소리로 하나가 된다. 우리 추석이 가족 단위 성묘라면, 일본 오봉은 마을 공동체가 어울리는 마당이다. 도시와 농촌 차이도 흥미롭다. 도쿄나 오사카의 직장인들은 오봉 기간 해외여행을 떠난다. 반면 지방 소도시에서는 여전히 가족들끼리 조상을 찾고 봉오도리 춤을 춘다. 우리도 명절을 간소화하고 해외를 떠나는 가정이 많다. ‘가족과 조상’을 중심으로 뿌리를 확인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명절을 구습으로 여기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10월 2~12일까지 인천공항을 이용하는 여객을 245만3,000명으로 전망했다. 지난해에 비해 80%가량 급증했다. 양국 모두 전통과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다. 한국의 ‘귀향과 제례’, 일본의 ‘머무름과 어울림’이라는 아름다운 풍습은 위기를 맞았다. 한국에서 ‘명절 스트레스’라는 신조어가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일본은 명절에 귀향하지 않는 ‘U턴 거부 세대’가 일상화됐다.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면 명절은 세대를 잇는 촉매제다. 설과 추석, 신정과 오봉은 두 나라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자리다. 한국인과 일본인에게 명절은 단순한 공휴일이 아니다. 자연에 감사하고 흩어진 가족과 이웃을 만나는 따뜻한 시간이다. 서로 다독이고 보듬고 격려하며 위안을 얻고 돌아간다면 그것으로 흡족하다. 두 나라 명절을 공유할 기회가 있다면 문화적 차이를 좁히는 기회로 삼아도 좋다. 이번 추석 연휴 일본을 찾는 한국 관광객은 50만 명을 웃돌 전망이다. 무엇을 보고 올지는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퇴임을 앞둔 이시바 총리가 30일 한국을 방문, 이재명 대통령과 만났다. 자주 오가다 보면 차이를 넘어 평화로 가는 작은 시작을 만들 수 있으란 생각이다.
    2025.10.01 11:10:24
    ‘한국은 귀향, 일본은 머무름’ 대조적인 한일 명절 풍경
  • 일본, 일본인 이야기
    ‘일본에 왔구나’ 하는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가 자판기다.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정말이지 많은 곳에서 다양한 자판기와 만난다. 도쿄 번화가, 시골 기차역 플랫폼, 고즈넉한 신사, 공원 산책길, 지하철역, 아파트 입구, 골프장까지 없는 곳이 없다. 심지어 이런 곳에까지?라며 놀라게 되는 곳에도 어김없다. 자판기 종류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자판기에서만큼은 일본인은 한국인의 창의력을 훌쩍 뛰어넘는다. 전통적인 음료나 담배, 스낵 자판기는 물론이고 컵라면, 아이스크림, 라면, 우동 자판기까지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냉동식품과 술, 야채, 과일, 꽃, 부케, 우산, 속옷 자판기까지 있으니 ‘자판기 왕국’이라는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자판기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기계가 아니다. ‘길거리 실험실’이다. 편의·놀이·지역성·비상용품까지, 아이디어와 기술이 더해져 작은 무인 상점처럼 진화하고 있다. 일본 여행에서 이색 자판기 탐방은 흥미로운 경험이다. 도쿄 아키하바라의 ‘수프 자판기’, 홋카이도 농가의 ‘옥수수 자판기’, 니가타의 ‘사케 자판기’처럼, 색다른 자판기를 찾는 일은 여행에 소소한 재미를 더한다. 길모퉁이마다 서 있는 자판기에서 버튼을 눌러 캔 커피가 “톡” 하고 떨어지는 순간, 묘하게 일본답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에치코유자와 역에서 기억은 각별하다. 소설 ‘설국’의 무대에서 자판기 사케를 마시는 순간 소설 속 감흥으로 빠져들었다. 2024년 말 기준 일본에는 약 391만 대의 자판기가 있다. 그중 220만 대는 음료 자판기다. 일본 인구가 1억 2400만 명이니 30명 남짓에 한 대꼴이다. 2000년대 초반 560만 대에 비하면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밀도다. 지난달 규슈 여행길에서 그 숫자가 단순 통계를 넘어선 ‘생활의 풍경’임을 새삼 실감했다. 오이타 현 사이키 시 해안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서였다. 가는 내내 만난 자동차라고는 두서너 대가 고작인 오지였다. 한적한 해안도로와 바닷바람이 스치는 방파제 끝에서 빨간색 자판기를 만났다. 누가 이런 곳에까지 와서 자판기를 이용할까 싶었다. 뜨거운 모래바람이 흩날리는 오후 버튼을 눌렀다. 금세 물방울 맺힌 차가운 우롱차가 나왔다. 유령 같은 마을에서 자판기만 살아 움직였다. 일본에서 자판기 문화가 번창한 배경에는 사회적 토양이 깔려있다. 무엇보다 치안이 좋아 도난 위험이 적고 파손 위험이 적다. 인적이 드문 해안도로에도 자판기를 세워둘 수 있는 이유다. 인파가 붐비는 지하철역 등 고밀도 생활권과 협소한 골목상권도 자판기와 잘 맞는다. 자판기는 좁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상대할 수 있는 효율적 수단이다. 다른 하나는 편의성이다. 오랜 시간 일하고 늦게까지 이동하는 사회에서, 24시간 언제든 물 한 병, 커피 한 캔을 살 수 있다는 건 큰 안도다.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믿음은 작은 위안이다. 현금 사용 비중이 높은 생활 습관도 자판기 문화와 맞물려 있다. 지금은 현금뿐만 아니라 교통카드나 QR결제도 보편화 됐다. 유연한 결제 방식은 자판기 사용을 한층 편하게 만들었다. 산토리·아사히·코카콜라 제조사들은 자판기를 거대한 유통망으로 삼는다. 도매상과 소매 점포를 거치지 않고도 자판기를 통해 신제품 시장조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곧바로 소비자 반응을 확인하고, 가격 전략을 기민하게 바꿀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기업의 이런 ‘직접 소매’ 전략은 일본의 자판기 문화를 지탱하고 있다. 물론 모든 게 순탄한 것은 아니다. 인구 감소와 편의점 확산, 물가 상승은 수익성이 떨어지는 자판기를 줄이는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전에 비해 자판기가 감소한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빈자리를 새로운 자판기가 채운다. 지방 특산 음료, 한정판 간식, 심지어 수소 전원으로 움직이는 친환경 자판기까지 등장했다. 일본에서 자판기는 단순한 판매 기계를 넘어 ‘작은 길거리 이벤트 상점’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오이타 사이키 해안가에서 만난 자판기는 곧 사라질 소도시의 애잔함을 담고 있다. 사람은 떠나고 폐가만 늘어나는 곳에서 자판기도 조만간 자취를 감출 게 분명하다. 여름 한낮 텅 빈 마을을 도는 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이미 오래전 폐교한 게 분명한 소학교 정문은 출입을 막는 쇠줄이 걸려 있었다. 그럼에도 입구에는 어김없이 코카콜라 로고가 선명한 자판기가 있었다. 누가 여기까지 와서 자판기를 이용하는 것인지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쩌다 들리는 눈먼 관광객을 상대로 푼돈이라도 벌어보려는 심산에서 설치한 것은 아닌지 짐작할 뿐이다. 인적이 드문 황량한 마을에도 여전히 “언제나 거기 있는” 자판기는 을씨년스러운 마을풍경과 묘한 대비를 이뤘다.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는 일본 사회의 단면이다. 마을을 떠나기 전, 방파제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우롱차를 한 모금 마셨다. 눈앞에는 바다, 옆에는 자판기가 쓸쓸히 서 있었다. 일본에서 자판기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삶의 방식이자 풍경을 담은 거리의 소품이다.
    2025.09.22 10:46:36
    바닷바람 속 풍경이 된 일본 자판기
  • 일본, 일본인 이야기
    일본 평화헌법 9조는 전쟁 포기, 전력 보유 금지, 교전권 불인정을 명문화하고 있다. 패전 직후 연합군 점령하에서 뼈대를 갖췄다. 비록 타의에 의한 것일망정 평화헌법 9조는 80년 가까이 일본의 정체성을 집약한다. 그러나 일본은 평화헌법에 걸맞은 비무장 국가가 아니다. 일본의 군사력은 세계 8위이며 국내총생산(GDP)의 1.4%에 해당하는 553억 달러를 국방비로 지출하는 군사강국이다. 참고로 한국은 세계 5위다. 결국 일본은 국제사회를 향해서는 평화를 외치는 한편 끊임없이 군사력을 증강해온 것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일본인의 습속은 평화헌법에도 반복된다. 국제사회는 일본의 평화 담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미국 해병과 일본 육상자위대가 참가하는 미일 합동훈련(9월 11~25일)이 진행 중이다. 중국과 러시아, 북한이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에서 결속을 다진 직후라는 점에서 관심이 높다. 비슷한 시기(9월 15~19일) 한미 연합훈련도 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한미일과 북중러가 대치하는 구도다. 미일 합동훈련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1만 9000명이 참가하고, 중거리 미사일 시스템 ‘타이폰’도 첫 동원됐다. 타이폰에 탑재한 토마호크 사거리는 1600㎞로 베이징과 평양을 사정권에 두고 있다. 중국과 북한은 강하게 반발했다. 일본 언론은 중국을 염두에 두고 있다며 중국을 겨냥한 훈련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일본이 군대와 최첨단 무기를 보유하고 해외 파병까지 하는 이유는 미국과 일본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눈감고 있다. 일본은 중국과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핑계삼아 꾸준히 군사력을 강화해 왔다. 한국을 포함 일본의 식민지배 기억을 공유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에 편승한 아베 정부 때는 아예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꾸며 헌법 개정까지 시도했다. 스스로 지킨다는 ‘자위대’의 무장을 강화하고 도처에 ‘평화’를 남발하며 과거사를 분칠해온 게 일본 평화헌법의 현주소인 셈이다. 일본을 다니다 보면 기념관과 박물관 등에서 평화라는 명칭을 흔히 접한다. 심지어 자살을 강요한 가미카제 특공기지마저 ‘치란평화특공회관’으로 부른다. 일본이 유독 평화에 집착하는 건 가해자로서 과거사를 덮고 합리화하려는 심리의 결과물이다. 일본 청년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놀랄 때가 한두 번 아니다. 대학교육까지 마쳤음에도 불과 100년 전에 일어난 역사를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지낸 나리카와 아야 역시 ‘지극히 사적인 일본’에서 자신과 또래들의 역사 인식 부족을 고백했다. 그들 잘못이 아니다. 아예 과거사를 가르치지 않는 일본 교육에 문제가 있다. 히로시마는 메이지 시대부터 군사·상무 도시였다. 1888년 제5사단 사령부가 설치됐고 청일전쟁(1894~1895) 때는 육군 대본영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병기창과 부대가 집중된 군사 거점이었다. 전후 히로시마는 “어떠한 군사시설도 없다”는 수사를 전면에 내세워 ‘평화 도시’를 자임해 왔다. 그러나 현실은 다른 방향으로 달린다. 히로시마에서 자동차로 불과 1시간, 41km 떨어진 이와쿠니 기지는 미·일 동맹의 최전선이다. 미군은 지난해 7월 이곳에 최신예 F-35 스텔스 전투기 배치한데 이어 이번에는 중거리 미사일 시스템 ‘타이폰’을 전개했다. 이른바 ‘평화의 도시’에서 한 시간 남짓한 곳에서 벌어지는 모순된 얼굴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그동안 ‘평화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과시해 왔다. 그러나 그 평화는 피해의 서사를 키우면서 가해의 역사와 책임을 흐리는 데 더 오래, 더 유용하게 쓰여 왔다. 이 불편한 비대칭이야말로 일본의 평화 담론에 물음표를 붙이는 이유다. 가해와 피해의 기억을 정직하게 기록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히로시마 원폭 공원에서 주어는 ‘일본인’으로만 수렴한다. 조선인 수만 명이 희생됐다는 사실은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평화공원 내부로 들어오기까지 무려 29년이나 걸렸다. 타자의 고통을 공원 울타리 바깥으로 밀어냈던 그 오랜 시간을 통해 일본의 이중성을 볼 수 있다. 지난 2016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히로시마 원폭 공원에서 헌화하고 피해자를 포옹했다. 또 한·일 정상은 2023년 공원 내 한국인 위령비를 찾아 함께 참배했다. 역사는 한 걸음씩 나아가며 화해한다. 그러나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앞세우며 군비를 증강하고 ‘피해자 일본’이라는 자기 서사에만 몰두한다면 평화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평화 담론에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당신들이 말하는 평화는 어떤 평화인가.” 피해의 기억만 부풀린 평화는 과거를 미화하고 현재의 군사화를 가린다.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이웃의 상처까지 보듬으며 힘의 사용을 억제할 때 비로소 평화에 도달한다. 선택은 일본의 몫이다. 히로시마 원폭 평화공원 강변에 서면 원폭 돔의 철골이 물그림자로 떨린다. 그 흔들림은 경고다. 평화는 기억을 선택하는 기술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포용하는 용기다. 일본이 그 용기를 택할 때, ‘평화 헌법’이라는 간판은 위장막이 아니라 약속이 된다. 그 약속 앞에서 비로소 일본이 말하는 평화 담론은 신뢰를 획득할 수 있다. 북중러 결속에 대응하는 미일 합동훈련과 치란평화특공회관, 히로시마 원폭 공원을 관통하는 평화를 생각한다.
    2025.09.16 14:20:56
    ‘전쟁하지 않는 국가’ 일본의 속내
  • 일본, 일본인 이야기
    지난해 가을 일본 홋카이도 치토세공항에 내렸을 때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맑은 하늘 아래 평야와 산림은 평온했지만 공항 인근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거대한 굴착기와 덤프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오갔고 기계음은 첨단 반도체 공장인 ‘라피더스’가 들어서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일본 열도 북쪽 소도시가 국가 전략산업의 무대로 바뀌는 현장이었다. 치토세시는 라피더스를 총력 지원했다. 인허가와 도로 정비, 숙소 확보를 신속히 진행했고 건설 차량이 몰려들자 전용 노선을 짜 교통 체증을 최소화했다. 라피더스는 소프트뱅크와 소니, 토요타, NTT 등이 2022년 세운 반도체 기업이다. IBM과 손잡고 2나노 시제품 개발을 마쳤으며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한다. 라피더스는 맞춤형 칩을 만드는 ‘싱글 웨이퍼’ 방식을 채택했다. 필요한 만큼 빠르게 공급하는 게 강점이다. 현지에서 만난 이들은 “이 작은 도시가 세계 반도체 지도의 한 축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좀처럼 허풍 떨지 않는 일본 국민성을 고려할 때 허언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홋카이도를 다니며 자연풍광에만 취했는데 이제는 경관농업과 함께 반도체가 중요 산업으로 떠올랐다. 지난 8월에는 구마모토 기쿠요초에 있는 TSMC 공장에 다녀왔다. 공항에서 차량을 렌트해 15분여를 달려 도착했다. TSMC 1공장은 규모부터 압도적이었다. 클린룸만 도쿄돔보다 크다. 인접 부지에서는 뙤약볕 아래 2공장 터파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구마모토가 세계 1위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를 유치한 건 2022년이다. 현지에서는 ‘자스무(JASM, Japan Advanced Semiconductor Manufacturing)’라고 부른다. JASM은 2024년 말부터 자동차·사물인터넷(IoT)용 반도체를 생산 중이다. 2022년 말 착공 이후 2년 만이니 빛과 같은 속도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때문에 2공장 가동 시기는 2027년으로 늦춰졌지만 현지 분위기는 낙관적이다. TSMC 유치 이후 구마모토 인구는 급증했다. 지난해 일본 광역 지자체 가운데 인구 증가율 1위였다. 공장이 들어선 기쿠요마치는 4만 3000명에서 5만 명을 넘어섰다. 양배추와 당근밭이었던 공장 주변이 첨단 반도체 공장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2년이면 충분했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부활을 국가 정책으로 내건 건 2021년이다. 반도체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키우기 위해서다. 홋카이도 라피더스와 구마모토 TSMC는 그 중심에 있다. 일본은 1980년대 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 1990년에는 반도체 제조사 매출 상위 10곳 중 6곳이 일본기업이었다. 그러나 삼성전자 등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현재 반도체 제조사 매출 상위 10곳 중 일본기업은 없다. 글로벌 점유율도 10% 미만이다. TSMC 유치는 반도체 산업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일본은 파격적으로 지원했다. 1, 2공장 총투자액 중 절반에 가까운 1조 2000억 엔(약 12조 원)을 보조금으로 지원했다. 눈여겨볼 건 지자체다. 구마모토현과 기쿠요마치는 중앙정부와 함께 치밀하게 움직였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농지 전용 절차를 단축하고 토지 소유자와 교섭도 지원했다. 또 공업용수와 전력 공급, 도로 등 인프라와 주거 환경을 빠르게 정비했다. 인력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지역 여론도 우호적으로 조성했다. 아소 화산지대에 속하는 구마모토는 깨끗한 지하수와 안정적이고 저렴한 전력 공급이 강점이다. 반도체 관련 기업도 꾸준히 유치해 왔다. 구마모토 내 반도체 기업은 200여 개에 달하며 규슈는 일본 반도체 산업 총 매출의 55%를 차지한다. TSMC 유치 이후 기쿠요치는 활기를 되찾았다. 주민들 표정에도 기대감이 묻어났다. 1, 2공장에서 3400명 이상 고용 창출이 가능하다. 또 TSMC와 관련된 일자리는 지역 평균 시급을 두 배 웃돈다. 관련 기업도 급증했다. 소니, 도쿄일렉트론, 미쓰비시전기, 후지필름 등 86개 이상(2024년 말 기준) 반도체 기업이 구마모토에 둥지를 틀었다. 이에 힘입어 규슈 지역 반도체 관련 설비투자는 100건을 돌파했고, 투자액은 5조 엔(약 47조 5000억 원)을 넘어섰다. 호텔도 속속 들어섰다. 대만 직원과 가족 400여 명이 왔다. 구마모토와 대만 사이에는 매일 2~3편에 달하는 직항편이 운항 중이다. 필자가 찾은 날에도 공항 로비는 대만 초등생 야구단으로 북적였다. 구마모토현은 초중고 과정을 갖춘 국제학교를 확장하고 대만인 통역사를 배치했으며, 일반 학교의 영어 교육을 강화했다. 또 구마모토대학교에 반도체 학과를 신설했고 내년부터는 대학원 과정을 운영한다. 점심 식사를 위해 들린 초밥가게 주인은 “TSMC 직원들로 인해 매출이 급증했다”며 활짝 웃었다. 구마모토 TSMC와 치토세 라피더스의 시사점은 크다. 일본은 소재·부품·장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반도체 역량까지 더해지면 한국 기업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일본은 정부와 민간이 하나로 뭉쳐 반도체 부활에 집중하고 있다. 막대한 보조금, 인프라 정비, 인력 육성, 신속한 행정 등 ‘원스톱 서비스’는 주목할 만하다. 한국은 위기 상황이다. 언론에 자주 회자되는 용인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은 6년 만에 착공했다. 일본과 대비된다. 주 52시간 근무에 예외를 두는 반도체특별법 또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 부활은 국가 차원의 강력한 의지, 신속하고 유연한 행정, 그리고 기존 산업 생태계와 연계할 때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치토세의 서늘한 바람, 구마모토의 뙤약볕 속에서 만난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흥이 예사롭지 않다.
    2025.09.03 11:42:57
    일본 반도체 부활 알리는 구마모토 TSMC·홋카이도 라피더스
  • 일본, 일본인 이야기
    일본에서 아이폰 점유율은 64%로 일본인들의 아이폰 사랑은 유별나다. 지하철 안에서 어떤 휴대전화를 사용하는지 살펴보노라면 예외 없다. 아이폰은 압도적 1위다. 구글(6%)과 삼성(5%), 샤오미(5%)가 나머지를 분점하고 있으나 존재감은 없다. 스마트폰을 구매할 일본 젊은이들에게 선택지는 오로지 아이폰이다. 갤럭시폰과 아이폰의 장단점을 따져 선택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젊은 층에서 아이폰은 단순한 스마트폰이 아니라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 젊은이들은 아이폰으로 소통하고 아이폰을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도구로 인식한다. 지난주 서울에 온 큰아이의 일본 친구들 역시 예외 없이 아이폰으로 길을 찾고 결제했다. 아이폰의 나라임을 거듭 확인한 자리였다. 유별난 아이폰 사랑은 왜일까. 편리함과 다양한 기능, 감각적인 디자인, 그리고 미국이라면 한 수 높게 치는 국민성이 떠오른다.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닌다. 소프트뱅크의 스마트폰 일본 시장 선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 이동통신 시장에서 소프트뱅크(21%)는 1위 NTT 도코모(36.6%), 2위 KDDI au(27.1%)와 3강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아이폰을 처음 접한 건 소프트뱅크를 통해서였다. 아이폰을 가장 처음 들여온 이동통신사가 소프트뱅크다. 소프트뱅크는 2008~2011년까지 독점 판매권을 행사했고 이후 KDDI au도 아이폰을 취급하면서 아이폰은 대세가 됐다. 일본인들은 아이폰을 통해 스마트폰 세상과 만난 것이다. 이러니 무의식 속에 스마트폰은 곧 아이폰이라는 관성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소프트뱅크는 손정의와 스티브잡스의 개인적 인연을 바탕으로 아이폰 독점권을 확보했다. 스기모토 다카시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가 쓴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에는 이와 관련된 일화가 나온다. 손정의는 아이폰이 출시되기 전 2005년 스티브잡스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아이팟에다 휴대전화 기능을 결합한 스케치를 보여주며 제품이 나오면 일본 판매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 약속을 기반으로 소프트뱅크는 2006년 3월 보다폰을 170억 달러에 인수한 데 이어 2008년 6월 아이폰 공식 판매권을 확보했다. 시대 흐름을 앞서 내다본 손정의의 통찰력이 주효했다. 소프트뱅크는 아이폰을 앞세워 빠르게 시장 점유율을 확장하고 NTT, KDDI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손정의는 플랫폼 사업에 진출하는 방식을 통해 사업을 확장해 왔다. 요즘은 플랫폼이라는 용어가 흔하게 통용되고 있지만 손정의가 사업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1980년만 해도 생소한 용어였다. 플랫폼은 시장 지배적인 사업을 뜻한다. 석유왕으로 불리는 존 D. 록펠러가 구축한 석유 생태계는 좋은 사례다. 록펠러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때 채굴부터 정제, 유통까지 석유 플랫폼을 장악했다.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은 록펠러를 헨리 포드와 함께 자동차 시대를 선도한 인물로 꼽는다. 록펠러가 석유를 공급하는 플랫폼을 구축하지 않았다면 포드의 대량생산은 무의미했다는 것이다. 컴퓨터 운영체제를 개발한 마이크로소프트, 검색 엔진 구글, 인터넷 유통을 장악한 아마존은 정보통신시대 플랫폼 기업인 셈이다. 록펠러가 그랬듯 손정의는 아이폰으로 시장 흐름을 주도한 것이다. 손정의 때문인지 후쿠오카는 창업 DNA가 넘실댄다. 일본 내에서 15~29세 청년 인구 비중(19.5%)이 가장 높고 스타트업 창업 분위기도 활발하다. 후쿠오카 시청에서 500m 거리에 있는 fgn(Fukuoka growth next)은 스타트업 산실이다. 1873년 설립된 다이묘 소학교를 리모델링해 2017년 4월 오픈했는데 148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번화가에 폐교를 존치한 것도, 스타트업에게 공간을 내준 것도 인상적이다. fgn은 입주 기업에게 월 15만 엔 수준의 저렴한 사무실 임대, 맞춤형 프로그램, 강력한 행정지원 혜택을 제공한다. 특히 사업계획서 한 장으로 비자를 발급해주는 ‘스타트업 비자’는 파격적이다. 일본인은 조용하다는 선입견도 fgn에서는 무색하다. 마침 찾은 때가 오후였는데 주변 거리는 스타트업에 종사하는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일본인들이 아이폰을 선호하고 후쿠오카가 역동적으로 바뀐 것은 손정의와 소프트뱅크 덕분이다. 후쿠오카 현지에서 만난 일본 청년들이 생각하는 손정의의 그늘은 생각보다 넓었다. 그들에게 손정의는 닮고 싶은 우상이다. ‘소프트뱅크 호크스’ 프로야구단 홈구장 pay pay돔에서 만난 미야사키씨(28) 일행은 손정의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지방도시 후쿠오카에 일본 청년들이 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도 후쿠오카 거리는 제2의 손정의를 꿈꾸는 젊은이들로 활기차다. 후쿠오카 fgn 모델은 대기업 유치에만 목을 매는 우리 지방 현실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스타트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성장모델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덧붙이자면 한국에서 아이폰(23%) 점유율은 갤럭시 폰(68.3%)의 3분의 1수준이다. 앞서 언급했듯 아이폰은 다양한 편리성, 강력한 브랜드 충성도, 현지화를 통해 일본 시장을 장악했다. 아이폰은 일본 교통 결제 시스템과 빠르게 연동해 실생활과 밀접한 서비스를 구축했다. 또 Felica 결제나 일본 특유 문자 통신환경에 최적화됐다. 일본 소비자들이 한국 제품이라서 갤럭시폰을 외면한다고 생각한다면 섣부른 국수주의일 뿐이다. 프리미엄 이미지 구축, 현지 통신사와 전략적 제휴, 현지 맞춤형 서비스를 주목해야 한다. 어설픈 민족주의로 재단한다면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아이폰과 소프트뱅크, 후쿠오카를 연결하면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인다.
    2025.08.22 17:18:12
    일본의 유별난 아이폰 사랑,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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