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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L처럼 기금간 무한경쟁…호주 연금 수익률 韓의 3배

[퇴직연금 프런티어]

의무적립 구조에 펀드간 경쟁 도입

장기·분산투자로 年 7~8%대 수익

4000조원 굴리는 민간형 노후자산 플랫폼으로 성장

호주 시드니 중심업무지구(CBD) 전경. 장문항 기자




호주 시드니에서 20년 가까이 금융 업종에 종사해온 한 직장인은 본인의 퇴직연금을 두고 ‘자동으로 불어나는 또 하나의 월급’이라고 표현했다. 슈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으로 대변되는 퇴직연금은 호주인에게 더 이상 제도가 아니라 생활의 일부가 됐다. 호주 퇴직연금 시장이 ‘자동 적립, 자동 투자’로 설계된 제도 아래 묵직한 복리의 힘을 쌓아가고 있는 가운데 장기 투자와 분산 운용을 축으로 연 7~8%대의 안정적 수익률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과 격차는 세 배 가까이 벌어졌으며 현지에서는 제도 설계와 투자 문화의 차이가 은퇴 후 자산 격차로 직결됐다고 지적했다.

11일 호주퇴직연금협회(ASFA)에 따르면 올해 6월 기준 호주의 퇴직연금 자산은 약 4조 3300억 호주달러(약 4000조 원)에 달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자산 비율도 꾸준히 상승해 지난해 기준 145%를 기록했으며 학계에서는 올해 160% 수준까지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근로자의 급여 12%를 의무적으로 적립하는 구조 위에 펀드 간 경쟁과 성과 평가 제도가 촘촘히 맞물리면서 ‘대규모 민간형 노후자산 플랫폼’으로 성장 중이다.

지난해 말 기준 최근 5년(2020~2024년) 동안 호주 주요 퇴직연금의 디폴트형(마이슈퍼) 상품 수익률은 평균 7~8% 수준이다. 근로자들은 법적으로 가입이 의무화돼 있으며 전체 계좌의 약 60%가 자동 편입돼 주식·채권·부동산·인프라 등 다양한 자산에 전문 운용사 중심의 분산투자가 이뤄진다. 호주에서 퇴직연금과 생애주기 재무 설계를 연구해온 헤이젤 베이트만 뉴사우스웨일스대(UNSW) 교수는 “호주인에게 퇴직연금은 누가 대신 굴려주는 돈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노후 포트폴리오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며 “이 같은 주인의식도 장기 투자 문화를 지탱하는 핵심 요인”이라고 말했다.

韓 퇴직연금 수익률 3배 달하는 호주…"자동으로 불어나는 또 하나의 월급"


호주 시드니 지역에서 시민들이 내리는 비에 우산을 쓰고 걷고 있다. 장문항 기자


호주 퇴직연금 제도는 ‘강제력·경쟁·투명성’이라는 세 가지 축이 맞물리며 효율적인 민간형 연금 구조로 발전했다. 근로자가 급여의 12%를 반드시 적립해야 하는 강제 저축 시스템이 기초가 되고 성과 평가와 투명한 정보 공개를 통한 경쟁이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투자 판단을 온전히 개인에게 맡기지 않고 제도 자체가 장기투자를 강제하는 점이 호주 연금 모델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특히 2021년 도입된 ‘유어 퓨처, 유어 슈퍼(YFYS)’ 제도가 시행 4년 차를 맞으면서 비용 절감 중심이던 경쟁이 장기 수익률 관리 경쟁으로 옮겨갔다는 분석이다. 성과 평가에서 부진한 펀드는 시장에서 퇴출됐고 규모가 큰 펀드를 중심으로 합병이 이어지며 산업 전반의 효율성이 높아졌다.

11일 호주 건전성감독청(APRA)에 따르면 매년 모든 퇴직연금 상품의 운용 성과는 벤치마크와 비교해 평가받는다. 2년 연속으로 기준을 밑돌 경우 신규 가입자를 받을 수 없고 사실상 합병 또는 청산 절차에 들어간다. 제도 시행 첫해에는 평가 대상 76개 중 13개 펀드가 탈락했지만 이후 부진 펀드 정리가 빠르게 이뤄지며 질적 성장을 이뤄냈다. 2018년 200여 개에 달했던 슈퍼애뉴에이션 펀드는 지난해 96개로 줄었다. 부실 펀드가 통합되며 운용 효율성이 높아지고 상위권 펀드로 자금이 몰리는 집중화 현상도 가속화됐다. 지난해와 올해는 2년 연속으로 평가 대상이 된 모든 상품이 기준을 통과했다.



성과 테스트 이후 시장의 초점은 수수료 경쟁에서 ‘성과 경쟁’으로 이동했다. 호주연금협회(ASFA)에 따르면 마이슈퍼의 평균 총비용률은 2019년 1.10%에서 2024년 0.89%로 떨어졌지만 같은 기간 평균 실질 수익률은 6.3%에서 7.5%로 상승했다. 저성과 펀드가 시장에서 도태되면서 규모의 경제가 강화되고 연금 산업 전체의 비용 구조가 개선됐다. 현지 업계에서는 “성과 테스트 제도가 연금 산업의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을 촉진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성과 평가제의 또 다른 파급효과는 투명성 강화다. APRA는 각 펀드의 수익률·수수료·비용 구조를 전면 공개하면서 회원이 직접 비교·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호주 국세청(ATO)이 운영하는 비교 도구는 모든 마이슈퍼 상품의 과거 5년 수익률과 총비용률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설계됐다. 회원들은 클릭 한 번으로 다른 펀드와 성과를 비교할 수 있게 됐고 자발적 이동이 활발해져 실제로 지난해만 약 150만 명의 가입자가 펀드를 갈아탄 것으로 집계됐다.

실제 호주를 대표하는 퇴직연금 회사인 CFS슈퍼는 성과 테스트 이후 상품 구조를 전면 개편했다. CFS슈퍼의 딘 토머스 헤드와 피터 래브리 디렉터는 “성과 테스트가 단기 수익률 중심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하지만 결과적으로 운용사들이 비효율적 구조를 재정비하는 계기가 됐다”며 “자산 배분과 리스크 관리 방식을 다시 정의하는 움직임이 산업 전반으로 확산됐다”고 입을 모았다.

이 같은 제도적 압박은 호주 자본시장 전반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주요 슈퍼펀드들은 자산을 국내외 주식·채권뿐 아니라 사모펀드(PEF), 벤처, 인프라 투자로 확장하며 새로운 투자 수요를 창출했다. 연금 자금의 대체투자 확대는 시장에 장기 자본을 공급하고 리스크 자산에 대한 민간투자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호주 증시 시가총액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40%를 웃돌고 주요 인프라 프로젝트의 상당수가 연금자금으로 조달되고 있다.

호주 솔로몬스 자산운용의 박철구 재무사는 “호주는 제도를 통해 단기 수익보다 누적 성과에 집중하는 구조를 완성했다”며 “한국도 이처럼 단순한 수익률 비교가 아닌 장기 성과의 일관성을 평가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약 3500억 호주달러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 호주퇴직연금(ART) 관계자도 “성과 테스트가 대형 펀드의 장기 수익률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는 긍정적 효과를 냈다”면서 “규모의 경제가 회원의 실질 수익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확립됐다”고 밝혔다.

호주 정부는 내년부터 YFYS 제도의 평가 항목을 보완하고 퇴직 후 인출 단계 성과 평가 도입도 추진 중이다. 제도가 안정기에 접어든 만큼 장기 성과와 회원 복지의 균형을 찾는 ‘2단계 개혁’이 시작됐다는 해석이다.

호주 CFS슈퍼의 딘 토머스 헤드(오른쪽)와 피터 래브리 디렉터. 장문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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